시부사와에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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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사와 에이이치
渋沢栄一 Shibusawa Eiichi
시부사와.jpg
출생 1840년 3월 16일
사망 1931년 11월 11일 (91세)
국적 일본
직업 사업가, 고위관료

개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근대 일본의 사업가이자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 초기의 대장성[1] 관료이다.

생애

1840년 무사시국 한자와군[2]에서 부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시부사와 가문은 물감의 제조와 판매, 쌀, 보리 등의 생산과 그 외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는 부유한 가문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며 상업적 재능을 길렀으며, 아버지와 삼촌으로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북진일도류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도리어 사무라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해당 무술을 익히며 관련 지사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함께 막부를 무너뜨릴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정변을 겪으며 해당 세력이 약해지고, 섬기는 세력을 옮기게 되는데, 그 대상이 훗날 에도막부의 마지막 쇼군이 될 도쿠가와 요시노부이다.

요시노부가 쇼군에 등극하며 에이이치 또한 막신[3]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대사의 수행원으로서 방문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며 견문을 기른다. 그곳에서 선진 금융제도와 산업에 대해 공부한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요시노부의 명에 따라 다시 사업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그는 주식회사 제도를 일본에 도입하는 등 선진 사업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대장성에 들어가 관료로 일하게 된 그는 도량형의 제정과 국립은행조례제도 등 다양한 개혁안에 관여하였다. 하지만 동료 관료와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하고 1873년 퇴직하여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걷는다.

퇴직 후 에이이치는 상법강습소를 설립하고 제일국립은행의 초대 총장으로 역임하며 수많은 지방은행의 설립을 지도하였다. 그 외에도 가스와 보험, 주류기업, 물류회사와 식료품 관련 사업, 철도 관련 사업[4] 등 수많은 기업의 설립에 참여하며 관리하였다.

노년기에는 정치인으로서도 짧게 활동하였고, 사회운동에 많은 기여를 보였다.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와 현대 문명을 비판하며 사회에 대한 비판을 일삼으며 다른 자본가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기부금을 모으거나 의료와 교육 시설을 설립하고, 국제적인 봉사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26년과 1927년에 노벨평화상에 지명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과의 관계

일본 내에서는 존경받는 사업가로 묘사되었으나, 대한제국의 입장에서 그는 한반도 경제침탈을 이끈 일본의 거대 자본가일 뿐이었다.

에이이치는 경인철도합자회사와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사장이었으며, 경인선과 경부선 부설권을 제임스모스에게서 인수한 장본인이다. 그는 경인선과 경부선의 공사를 추진하며 일본의 대륙 진출과 이은 전쟁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경성전기의 사장을 맡았고,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한반도에 제일국립은행에서 발행한 원화를 유통시켰다.

1원권

유통된 지폐 1원, 5원, 10원권에는 모두 제일은행 총장인 에이이치 본인의 초상을 그려넣었다.

각주

  1. 일본의 과거 중앙 행정기관. 메이지 유신부터 존재했으나 2001년 중앙 성청 개편으로 사라졌다.
  2. 현 사이타마현 후카야시
  3. 막부의 가신
  4. 경인철도합자회사의 경인선 부설이 이에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