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지형스님(志炯, 1947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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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의정(義淨) 지형(志炯)스님은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7 서울 출생
1966 광주 흥룡사에서 법인(法印)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7 광주 흥룡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1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2 동학사 강원 중강[1]
1973 동학사 강원 졸업, 조계종 중앙교육원 제6기 수료
1976 월정사 지장암에서 하안거 성만
1980 동국대학교 승가학과 졸업
1981 경국사 법보강원 제1회 졸업
1982~1985 화운사 강원 강주[2]
1984~1986 단일계단 사미니계율 교수사
1987~2004 청암사 강원 주지 및 학장 겸임
1987 김천 소년교도소 종교위원
1991 행자교육원 제1기 사미니계율 교수사(이후 5기, 16기, 21기, 22기 역임)
1994 개혁종단 개혁 상임위원
1995~2004 교육원 교육위원
1996~2004 단일계단 비구니 갈마위원
1997~1999 교육원 역경위원
1998~2004 대한불교 조계종 12대 중앙종회의원
2001~2004 행자교육 운영위원 및 교수사
2002 식차마나니계 갈마위원
2004 청암사승가대학 강주 및 학장
2021 동화사에서 명사 법계를 품수
문중 두옥문중(斗玉)
생활신조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저서 및 작품 논문 〈대승기신론에 대한 연구〉, 〈능엄경에 대한 고찰〉 외 다수
상훈 중앙교육원 제6기 총무원장상 수상(1973년)
수계제자 도업·도림(道林)·보련(普蓮)·도겸·도현(道玄)·길장(吉藏)·명준(明俊)·명오(明悟)·도유(道逾)·도성(道成)

활동 및 공헌

출가

[동학사 여름방학 (1967)]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51
[중강 시절 동학사에서 (1972)]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52
[화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강주 취임 기념 (1982)]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53
[도반 상덕스님과 함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55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56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57

의정(義淨) 지형(志炯)스님은 1947년 8월 21일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에서 아버지 박기태(朴基太)와 어머니 이인수(李仁壽) 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성수이다.

스님의 집안은 대대로 불심이 매우 깊었다. 평생을 불교에 귀의해 수행정진 하였던 증조모님은 입적 후 사리 32과가 수습되어 사리탑(嘉善大夫戶曹參判 密陽朴公悰豐之配般若藏 (가선대부호조참판 밀양박공종풍지배반야장; 광주시 흥룡사 소재)이 세워질 만큼 뛰어난 수행자였다. 뒤를 이어 조모이신 조연지월(趙蓮池月) 보살 역시 돈독한 불심을 지닌 분이었다. 이 두 분이 이끄시는 대로 스님은 동진으로 산문 생활을 시작하였다.

스님은 총명하고 밝은 성품을 타고났다. 어버이 같은 관심과 애정을 쏟으셨던 안광호(安光毫) 노스님과 은사 법인(法印)스님의 도제 양성 의지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여 전남여중과 대구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66년 법인스님을 은사로, 고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71년에는 석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노스님이신 안광호스님

스님의 출가를 누구보다 기뻐하셨던 안광호 노스님은 조계종 전국 비구니회 고문과 비구니 금강계단의 초대 존증(尊證)아사리로서, 광주 흥룡사, 순천 선암사, 동학사 주지 등을 역임하신 비구니계의 큰 별이셨다. 통도사 극락암 경봉 큰스님께서도 광호 노스님을 비구니계의 거목이라 하셨으며, 동학사 주지시절 강당을 복원하여 현재의 비구니 전문 강원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노스님의 원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노스님은 비구승 못지않은 용모와 기개로 수행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으셨고 철저한 계행을 몸소 지니셨으며, 일체의 물욕이 없는 무소유인 이셨다. 손상좌인 지형(志炯)스님이 그 성품 그대로 물려받은 듯하다.

수학

지형스님은 1967년 노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동학사 강원에 입학하였다. 입학한 뒤 당시 재무 소임을 맡으신 은사스님의 시자를 살았는데, 엄격히 지도하시는 은사스님의 가르침에 힘입어 큰 방 생활을 하며 대중의 규칙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학인 시절 내내 스님은 시자[3] 와 서기, 별좌[4], 입승[5], 교무 등 여러 소임을 살았는데, 소임이 주어질 때마다 어른 스님에게 순응하고 대중과 화합하며 수행자로서의 위의를 갖추어나갔다.

공부에 대한 열정과 흥미도 남달라 소임이 끝난 후 경책을 들면 밤늦게까지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열심히 하였다.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게 공부하였던 스님은 당시 일본 대정대학 출신으로 유식에 밝으신 호경(湖鏡) 대강백스님으로부터 경을 보는 안목을 높이 평가 받았다. 사교반 때 이미 학인의 신분으로 중강 소임을 맡아 치문반을 가르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으며 강사로서의 기본 소양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가산(伽山) 지관(智冠)스님으로부터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전강을 받다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부산 보덕사에서 은사스님을 3년간 모셨으며, 1976년 월정사 지장암에서 하안거를 성만하였다. 그러나 참선 수행을 할 때 바른 견지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일대시교를 꿰뚫어 수행의 확고한 지침을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자 하안거를 함께 성만했던 입승 현묵스님 등 어른스님들은 이 사실을 알고 아까운 수좌를 놓쳤다며 매우 아쉬워하셨다.

공부 도중 스님에게는 홍콩과 일본 유학의 기회가 여러 번 주어졌으나 노스님과 은사스님의 뜻을 받들어 유학의 길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스님은 대학에 다니면서 저녁에는 경국사 법보 강원에서 가산(伽山) 지관(智冠)스님에게 사교와 『화엄경』, 『선문염송』을 재강(再講)하였다.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된 스님은 마침내 전체적으로 글을 꿰는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까지 즐겨보는 『능엄경』 또한 지관스님과의 재강을 통해 새롭게 만나게 된 경전이다.

‘망심(妄心)을 없애고 진심(眞心)을 닦아 선정에 이르게 하되, 풍부한 비유와 치밀한 논리로써 실천적 수행의 길잡이로 삼을 만하다’는 경전 『능엄경』을 보고 처소로 돌아올 때면 환희심에 벅차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스님은 그 후 동국대학교와 법보 강원을 졸업하고 부산 보덕사에서 은사스님을 시봉하던 중 스승이신 지관스님의 추천을 받아 1982년 3월 용인 화운사 강원의 강주로 취임하였다. 그때 지관 스님은 스님의 취임식에 직접 참석하여 학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강사는 마를 ‘강’자 강사라고도 부르니, 여러분들이 잘 보필해서 건강하게 강의하도록 잘 모시길 바랍니다.”

지관스님으로 부터 법호와 전강게를 받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의정(義淨)이란 법호와 함께 내려주신 전강게는 다음과 같다.

고제법령현시방 (高提法令現十方) 법령을 높이 들어 시방에 나투어서서
교화필수세존설 (敎化必須世尊說) 세존의 말씀을 갖추어서 교화하며
연교강선겸정진 (硏敎講宣兼精進) 교학과 강을 폄에 정진을 겸하여
위도중생광선설 (爲度衆生廣宣說)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널리 선설하라

강주가 되다

학교를 졸업하고 선방을 가지 않는 스님에게 ‘그동안 먹은 밥그릇 숫자만큼 밥값을 해야 한다.’고 경책하셨던 구산 큰스님은 스님이 강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그리고 친필 두 점과 친히 법문하신 바라밀 테이프와 『반야심경』 강의 테이프를 보내주셨다.

강주가 된 지형스님은 처음 얼마 동안은 다른 강사가 없어 네 반을 혼자 가르쳐야 했다. 2년 후 동학사 강원 후배인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현재의 청암사 주지, 강사)이 중강으로 부임하면서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스님과 상덕스님의 아름다운 도반의 동행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화운사에서 나온 스님은 상덕스님과 김천 청암사에 비구니 강원을 세우겠다는 발원을 하였다.

청암사 승가대학 건립

마침내 1987년 정월 그믐에 가르침을 요청하는 학인 16명과 청암사에 들어와 청암승가대학을 세우고 주지 및 학장을 겸하게 되었다.

스님 일행이 처음 도착했을 당시만 해도 청암사는 전각 대부분이 비가 새고 지붕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대방채인 육화료에서만 기거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스님은 학인들과 함께 전각마다 찌든 때를 제거하기 위해 양잿물로 기둥과 마루를 닦아야 했다. 또한 연일 계속되는 울력으로 아픈 학인이 나오면 직접 돌보고 위로하는 등 학인들과 동사섭(同事攝)하며 어려운 난관에도 아무런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수행자의 품위와 기개를 지켜나갔다.

청암사 불사

스님은 청암사에 들어온 첫 해에 육화료 불사와 진영각 보수공사를 원만히 회향하였다. 그 후 1991년 극락전의 보수공사를 걱정하고 있는데 마침 찾아오신 송광사 방장 범일보성(梵日菩成) 큰 스님께서 7일 철야기도를 해보라고 권유해주셨다. 기도의 가피로 극락전 보수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대중들은 환희심으로 충만하였다.

그때 시작된' 법화경 산림 7일 철야기도'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스님은 극락전 보수공사에 이어 선열당, 중현당, 종각 그리고 백화당을 창건하였다.

스님의 불사 원칙은 가장 상식적인 것이다. 늘 환경 보호를 생각하되 필요에 따라 불사의 규모는 최소화할 것, 도량의 옛 모습을 지키고 수명만 연장시키는 개보수를 할 것 등 스님은 늘 원칙을 준수하였다.

어느 때인가 학인들이 밭에 그늘이 진다고 나무를 톱으로 베어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스님은 대중을 모두 모이게 한 뒤 “이 산중의 진짜 주인은 땅과 물과 나무들이에요. 우리는 그저 이곳을 잠시 빌려 살고 있을 뿐 우리 마음대로 함부로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됩니다.”하고 당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나무 한 그루를 베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스님의 환경관이 철저하게 지켜짐에 따라 지금까지 청암사는 천년 고찰의 신비로움과 청정함을 그대로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스님이 강의를 통해 후학 양성의 길에 매진해가고 있을 즈음, 조계종단의 요청으로 개혁 상임위원과 12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게 되었다. 1984년에는 사미니 계율 교수사로 사미니율의를 강의하는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지형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으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고시위원,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교육위원, 행자교육원 운영위원, 행자교육원 사미니 계율 교수사, 단일계단 비구니 갈마위원 등을 맡아 종단 일 을 보고 있다. 종단 일 외에도 20여 년 동안 김천소년교도소 종교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섭수된 인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수행자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 스님이 평소 학인들에게 누누이 강조하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곧 ‘어느 곳에서나 주인의식을 가지고 서 있는 곳 그대로가 다 진(眞)이다’는 가르침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인 때부터 시작한 강학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스님은 청매선사의 무익한 열 가지 가르침 가운데 첫 번째인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라’, 곧 ‘마음으로 반조하지 않으면 경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는 가르침이 날이 갈수록 가슴 깊이 와 닿는다고 한다.

마음의 눈으로 경을 볼 때만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음을 알기에 스님의 가슴속에는 수십 수백 권의 경을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날선 검 한 자루가 늘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아유일권경 (我有一券經) 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으니
  불인지묵성 (不因紙墨成)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이라
  전개무일자 (展開無一字) 펼쳐보아도 한 글자가 없으나
  상방대광명 (常放大光明) 항상 대광명을 놓음이라

※ 출처 : 서산대사 운수단(雲水壇, 서산대사께서 편찬한 불교의식집)

이렇듯 지형스님은 티 없이 해맑은 자태 속에 수행자의 시퍼런 기개와 물 한 방울도 내 것 삼아 허투로 하지 않는 청빈함으로 한결같은 길을 걷고 있다. 스님은 2021년 명사법계를 품수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도업·도림(道林)·보련(普蓮)·도겸·도현(道玄)·길장(吉藏)·명준(明俊)·명오(明悟)·도유(道逾)·도성(道成) 등 현재 18명이 있으며, 이미 졸업한 수학제자는 500여 명으로서 각자의 처소에서 수행과 포교에 정진하고 있다.

김천 청암사

[청암사 전경]
사진출처: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jungde13/222636523353

멀리 가야산 자락이 보이고 가까이는 불령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인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859년(신라 헌안왕 3년)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이다.

사적에 의하면 청암사는 1647년(조선 인조 25년)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당대의 강백이었던 벽암(碧巖) 각성(覺性)스님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노정(盧靜) 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중건하였다.

그 후 숙종의 정비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당시 이곳의 극락전에 기거하면서 기도했던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불령산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1905년(고종 9년) 당시 주지 대운당 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 보살 한 분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3년 동안 염불해달라고 부탁하며 크게 시주를 하였다. 이리하여 대운당 스님은 쇠락한 극락전을 다시 중건하고 만일회를 결성하였다. 극락전은 염불당으로서 염불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으로 명성을 드날렸는데, 청암사 강원의 효시인 조선시대 대강백이자 선사이신 회암(晦庵) 정혜(定慧)스님께서 주석하신 때이다.

손대지 않은 자연 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 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고, 140여 명의 초심 학인들이 부처님 경전 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 바로 천년 고찰 청암사이다.

  •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358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지형(志炯)스님 본항목 지형스님(志炯, 1947~) 志炯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지형스님(志炯,_1947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지형스님(志炯) 두옥문중(斗玉) ~의 일원이다
지형스님(志炯) 법인스님(法印) ~의 수계제자이다
지형스님(志炯) 광주 흥룡사 ~에서 출가하다
지형스님(志炯) 고암스님(古庵)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지형스님(志炯)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지형스님(志炯) 명사법계(明師法階) ~을(를) 품수하다
지형스님(志炯) 김천 청암사 ~을(를) 중창하다
지형스님(志炯) 청암사 강원(승가대학)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지형스님(志炯) 청암사 강원(승가대학) ~을(를) 건립하다
지형스님(志炯) 대한불교조계종 행자교육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운영위원, 교수사
지형스님(志炯)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교육위원, 역경위원
지형스님(志炯) 안거 ~을(를) 성만하다 평창 월정사 지장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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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주석

  1. 강주를 보좌하는 소임
  2. 승가대학의 교육 전반을 관장하는 소임
  3. 웃어른을 가까이 모시고 시중드는 소임
  4. 음식 · 방석 · 이부자리 등을 담당하는 소임
  5. 사찰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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