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상언(古庵祥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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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고암상언(古庵祥彦 : 1899~1988)
  • 생애·업적 : 제2대 해인총림 방장, 제3·4·6대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고암 스님은 1899년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 425번지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윤지호(尹志豪). 법명은 상언이며 호는 고암, 자호는 환산(歡山)이다.
1914년 적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7세 때 도선사, 망월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다 운수의 길을 걷는다. 19세 되던 1917년 7월 15일 해인사에서 제산(霽山) 스님을 은사로, 방한암(方漢巖)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는다. 스님은 1919년 3·1독립운동 때 서울과 개성 등지를 오가며 3년 동안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다가 백용성 스님을 만나 1922년 해인사에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1923년 백양사 운문암 선원에서 40~50명의 납자와 정진한 뒤 1924년 황악산 직지사 천불(千佛)선원에서 제산 스님을 모시고 한 철을 지냈다. 그 해 수도암 선원에서 동안거를 보내고 1925년 다시 직지사로 가서 좌선하고 여름에는 또다시 수도암 정각에서 묵언정진했다. 1925년 동안거 때 도봉산 망월사 선원에서 열린 ‘만일참선결사(萬日參禪結社)’에 참여했다. 이후 1926년 만일결사가 통도사 내원암으로 이전함에 따라 내원암에서 대중들과 묵언정진 했다. 스님은 상원사 청량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했으며 도합 25하안거를 성만하였다. 특히 스님은 안변 석왕사 내원선원에서 참선 정진하다 심요(心要)를 얻어 게송을 남겼다.

선정 삼매는 단지 속에 일월 같고
시원한 바람 부니 가슴 속에 일이 없네.
禪定三昧壺中日月
涼風吹來胸中無事


1938년, 스님의 나이 40세 되던 해 양산 내원사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을 때,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서 몸을 일으켜 용성 스님 앞에 섰다. 두 스님 사이에 불꽃 튀는 법거량이 오고 갔다. 드디어 고암 스님의 견성이 여실함을 안 용성 스님은 만고풍월(萬古風月)이라고 칭찬한 이후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렸다.

부처와 조사도 원래 알지 못하고
머리를 흔드는 도리를 나도 또한 알지 못하네
운문의 호떡은 둥글 뿐이며
진주의 무는 길기도 하다.
佛祖元不會
掉頭吾不知
雲門餬餅團
鎭州蘿蔔長


스님은 1944년 2월 해인사에서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품수한 이래 전국 각처를 돌아다니며 후참 납자들의 수행 지도와 일반 대중들의 교화에 매진했을 뿐더러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율사로서의 면모를 다지며 지계 청정의 가풍을 보여 주었다. 크고 작은 법회를 가리지 않고 참석하다 보니 보살계를 제일 많이 설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1945년에 나주 다보사(多寶寺)선원 선원장에 취임했으며 광주 자운선원과 백련사를 오가며 6·25 전쟁 기간을 보냈다.
1952년 해인사에서 대종사의 법계를 품수한 이후 해인사·백련사·범어사·직지사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67년 7월 27일 조계종 제3대 종정에 취임 하였으며, 1970년 해인총림 2대 방장, 1972년 제4대 종정, 그리고 1978년에는 제6대 종정을 지내면서 한국불교와 조계종풍의 깃발을 널리 휘날렸다. 특히 스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머니 같은 모성적 자애심을 심어 주어 자비보살로 불리웠으며 하심과 인욕행을 묵묵히 실천하였다. 난해한 법어보다는 잔잔한 물결 같은 음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으며 현실적인 실천행을 강조했다. 다음은 스님의 이러한 특징을 보여 주는 해제법어다.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번쩍 드시고 말씀하시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본래 결제도 없거니 어찌 해제가 있을꼬!”
법상을 세 번 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알겠는가? 산간(山間)에 명월(明月)이요, 강상(江上)에 청풍(淸風)이로다. 이제 대중은 90일 동안 참선 학도하였으니 깨친 바가 무엇인지 일러 보아라.”
참선 학도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은 귀천과 노소 남녀와 이둔(利鈍) 고하의 차별을 막론하고 모두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그 명상(名相)이 다를 뿐 근원은 똑같아서 평등하고 원융하다. 그러나 불조와 선지식과 납자들의 깨치고 증득함에 더디고 빠르고 어렵고 쉽고 깊고 옅음이 있는 것은 무량겁을 두고 닦고 익혀 온 그 원력과 업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언하에 깨치고, 어떤 사람은 회광반조하여 하루 안에 눈을 뜨고, 또 어떤 사람은 며칠 혹은 몇 년 만에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둔하고 게으른 자는 죽을 때까지도 못 깨친 채 금생을 하직하고 만다. 이 어찌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니랴. 금생에 다행히 불법을 만났으면서 닦지 않고 게을리 허송세월하여 미끄러져 버린다면 다시는 더 붙잡을 기약이 없으리라. 그러니 이번 동안거에도 소득이 없는 이는 해제를 못한 것이다. 발분하고 발분하라. 금생에 이 일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어느 생을 기약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교단 안팎은 물론하고 눈밝은 지혜인을 갈구하고 있다.
용기 있는 선지식을 부르고 있다. 신념 있는 행동인을 아쉬워하고 있다.
어서 나서라,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무명 중생들의 저 구원의 절규가 들리지 않느냐.
묘도진리(妙道眞理)는 역력하고 분명하여 두두물물(頭頭物物)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옛 사람은 이같이 읊었느니라.

산하대지에 내린 한 조각 눈
햇빛이 비추니 자취 없이 스러졌네.
이로부터는 불조를 의심치 않으니
남북과 동서가 어디 있으랴.
大地山河一片雪
太陽一照便無踪
自此不疑諸佛祖
更無南北與東西


주장자를 세우고 말씀하시다.
"여인등산(如人登山)에 각자노력(各自努力) 이니라.”

스님은 1988년 다음의 열반송을 남기고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영원 속 본래 그 자리로 입적하였다. 세수 90세 법랍 71년이었다.

가야산색 단풍이 짙어졌으니
이로써 천하의 가을을 알겠네.
서리 내려 낙엽이 떨어지면 모두 뿌리로 돌아가고
구월 보름 밝은 달은 허공을 비추나니라.
伽倻山色方正濃
始知從此天下秋
霜降落葉歸同根
菊望月笑照虛空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12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