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문
탑비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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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승려 | 체징(體澄) |
찬자 | 김영(金穎) |
서자 |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
각자 | 현창(賢暢) |
번역본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1]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시보조선사 영탑비명과 서
조청랑이며 수정변부 사마 사비어대인 신 김영 교를 받들어 찬하고 유림랑이며 수무주 곤미현령인 김원 교를 받들어 쓰다.
듣건대 무릇 선(禪)의 경지는 그윽하고 고요하며 올바른 깨달음은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알기 어려워 허공과 같고 바다와 같다. 그러므로 용수(龍樹)와 사자(師子) 존자는 인도에서 파초에 비유하였고, 홍인(弘忍)과 혜능(惠能) 조사는 중국에서 제호를 이야기하였다. 대개 인과의 자취를 쓸어 색상(色相)의 땅을 떠나 대승의 수레를 타고 망상(罔象)의 경지에 들어갔다. 이런 까닭으로 지혜의 빛이 멀리 비추이고 은혜로운 못이 멀리 흘러 혼미한 거리에 법우(法雨)를 뿌리며 깨달음의 길에 자비의 구름을 펼친다. 공(空)을 깨달은 사람은 단숨에 저 사악한 산을 뛰어 넘으나 세상 일에 매어있는 자는 영겁이 지나더라도 악업에 가로 막혀 있다. 하물며 말법 세상에서는 상교(像敎)가 분분하나 부처의 가르침에 맞는 것은 드물고, 서로 편벽된 견해를 가지고 있어 물을 치고 들어가 달을 구하는 것과 같고 노끈을 비벼서 바람을 잡아 매려는 것과 같으니, 헛되이 육정(六情)을 수고롭게 한들 어찌 그 지극한 이치를 얻을 수 있으리오. 그것은 중생에게는 로사나불이 되고 로사나불에게는 중생이 되는 것인데 중생은 로사나불의 법계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고 종횡으로 업을 지으며 로사나불 또한 중생을 속에 품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잠연하여 항상 고요하니 어찌 미혹되지 않으랴. 이 미혹함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되지 아니한다. 그 미혹함을 아는 사람은 우리 선사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허황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도덕경(道德經)』에 이르기를 “상사(上士)는 도(道)를 들으면 그것을 숭상하여 받들고 중사(中士)는 도를 들으면 간직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하사(下士)는 도를 들으면 손바닥을 비비고 웃으며 웃지 아니하면 족히 도라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함이다.
선사의 이름은 체징(體澄)이며 성은 왕성인 김씨로 웅진 사람이다. 가문은 좋은 명망을 이었고 어진 가풍을 익혀 왔다. 이런 까닭으로 경사가 하늘로부터 모이고 덕이 큰 산에서 내려오니 효의(孝義)는 향리에 드날렸고 예악(禮樂)은 고관들 중 으뜸이었다.
선사가 몸을 의탁하던 해에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둥근 해가 공중에 떠 있고 빛이 내려와 배를 꿰뚫었다. 그 때문에 놀라 깨어서 문득 임신하였음을 알았다. 1년이 지나도 태어나지 아니하여 어머니는 상서로운 꿈을 돌이켜 생각하고 좋은 인연을 기도하며 음식은 고기를 물리치고 마실 것은 술을 끊어 청정한 계율로 태교하여 복전으로 섬겼다. 이로 말미암아 해산의 걱정을 이겨내고 진실로 아들을 낳는 경사를 맞았다. 선사의 용모는 산이 서있는 것처럼 빼어났고 기품은 하천이 신령스러운 것처럼 넉넉하고 고른 치아는 본디부터 있었고 금발이 특이하여 동네에서 탄성이 자자하였고 친척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완연히 세속을 떠날 기미가 있었고 이를 갈 나이가 되자 굳게 세속 인연을 버릴 생각을 품었다. 부모가 그를 부귀로 머물게 하기 어렵고 재색(財色)으로도 붙들 수 없음을 알고 출가하여 공부할 것을 허락하였다. 지팡이를 짚고 스승을 찾아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 문하에 들어갔다. 경전 배우는 것을 업으로 삼아 (스승의) 옷을 끌어당겨 더하기를 청하였고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정진하여, 눈으로 본 것은 빠트리지 않으며 귀에 들은 것은 반드시 기억하였다. 항상 거칠고 비루함을 도야하여 스님된 법도를 익히고 어질고 착함을 쌓아서 번뇌를 물리치며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여 신통묘용하니 초연히 무리 중에 뛰어나 우뚝함이 따를 사람이 없었다.
후일 태화(太和) 정미년에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 가서 구족계를 받았는데, 한 번은 계단장(戒壇場)에 들어가 칠일 밤을 도(道)를 행하자 갑자기 이상한 꿩이 나타나 홀연히 순하게 날아 들었다. 옆에 옛일을 잘 아는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진창(陳倉)에서 패왕(覇王)의 도(道)를 드러내었는데 오늘은 절에 날아드니 장차 법을 일으킬 큰 스님이 나타날 징조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도의대사(道儀大師)가 서당(西堂)에게 심인을 받은 후 우리 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설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경전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을 숭상하고 있어,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은 아직 이르지 아니하여 허망하게 여기고 존숭하지 않음이 달마가 양(梁)의 무제(武帝)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런 까닭으로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하였다. (염거선사는) 설산(雪山)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러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우리 선사가 가서 섬겼다. 일심을 맑게 수양하고 삼계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 몸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염거선사의 뜻과 기품에 짝할 사람이 없고 소양과 기개가 빼어남을 살피고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을 전수하였다.
개성(開成) 2년(837) 정사에 동학인 정육(貞育), 허회(虛懷) 등과 함께 길을 떠나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찾아보고 15주를 편력하여 그 세상도 좋아하고 하려고 함이 똑같고 성상(性相)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이에 말하기를 “우리 조사가 설한 바는 덧붙일 것 없으니 어찌 수고로이 멀리 가랴!” 하고 발걸음을 그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 5년(840년) 봄 2월 평로사(平盧使)를 따라 고국에 돌아와 고향을 교화하였다. 이에 단월이 마음을 기울여 불교가 계속 이어짐이, 온 하천은 오산의 골에서 시작되고 뭇 산령은 영취산(靈鷲山)을 마루로 하는 것으로도 비유하기에 충분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무주(武州)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무르니 때는 대중(大中) 13년(859년) 용이 석목(析木)의 나루에 모인 무인년 헌안대왕 즉위 이듬해였다. 대왕은 소문을 듣고 도(道)를 앙모하여 꿈에서도 애를 쓰고 선문(禪門)을 열고자 하여 서울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여름 6월 왕명으로 장사현(長沙縣)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을 파견하여 차와 약을 보내고 맞이하게 하였다. 선사는 구름과 바위를 벗삼아 지내는 것을 편안히 여겼고 또 결계(結戒)의 달이어서 정명(淨名)의 병을 칭하고 육조(六祖)의 고사를 말하였다.
겨울 10월 교(敎)로써 도속사(道俗使) 영암군(靈巖郡) 승정(僧正) 연훈법사(連訓法師)와 봉신(奉宸) 풍선(馮瑄) 등을 보내 왕의 뜻을 설명하여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기기를 청하였다. 드디어 석장을 날려 산문에 옮겨 들어가니 그 산은 곧 원표대덕(元表大德)이 옛날 거처하던 곳이었다. 원표대덕은 법력으로 정사에 베풀어 그 때문에 건원(乾元) 2년 특별히 교(敎)를 내려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우게 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다. 당(唐) 선제(宣帝) 14년 2월 부수(副守) 김언경은 일찍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문하의 빈객이 되어 녹봉을 덜고 사재를 내어 철 2,500근(斤)을 사서 로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절을 장엄하였다. 교(敎)를 내려 망수(望水), 이남택(里南宅) 등도 금(金) 160분(分), 조(租) 2,000곡(斛)을 내놓아 공덕을 꾸미는데 도와 충당하고 가지산사는 선교성(宣敎省)에 속하게 하였다. 함통(咸通) 신사년에 십방(十方)에서 물자를 보시하여 그 절을 확장하였는데, 경사로운 낙성일에 선사가 임하니 암수 무지개가 법당을 뚫고 들어와 방을 휘황하게 비추며 반짝이는 빛이 사람을 밝혀 주었다. 이는 곧 견뢰(堅牢)와 사가(娑迦)가 상서로움을 알리고 나타내는 것이라.
광명(廣明) 원년(880) 3월 9일 여러 제자에게 고하기를 “나는 금생의 보업(報業)을 다하여 죽음의 조짐이 있구나. 너희들은 마땅히 법을 잘 지키고 게으름에 빠지지 말라” 하였다. 4월 중순 12일에 이르러 천둥 번개가 유시부터 술시까지 온 산에 울리고 13일 밤 자시에 상방(上房)의 땅이 흔들리더니 하늘이 밝아오자 오른 쪽 옆구리로 누워 임종하니 향년 77세요, 승랍 52년이었다. 이에 제자 영혜(英惠), 청환(淸奐) 등 800여 인은 의리가 어버이를 잃은 듯 깊고 정은 하늘과 땅에 닿아 추모하여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그 달 14일 왕산(王山) 송대(松臺)에 장사지내고 탑을 쌓아 안치하였다.
오호라, 선사의 이름은 여기에 남았으나 혼백은 어디로 갔는고. 생명은 오탁(五濁)을 떠나 18공(空)을 뛰어 넘어 기꺼이 적멸하여 돌아오지 않고 법림(法林)을 남겨 길이 빼어나니, 어찌 사계(沙界)에서 생령을 제도했을 뿐이겠는가? 실로 또한 삼한에서 성조의 교화를 도운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별자(別子)가 조(祖)가 된다” 하였는데, 강성(康成)이 주를 붙이기를 “그대가 만약 처음으로 이 나라에 왔다면 후세에서 조(祖)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달마는 당나라의 제1조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곧 도의대사(道儀大師)를 제1조, 염거선사(廉居禪師)를 제2조로 삼고 우리 스님을 제3조로 한다.
중화(中和) 3년(883) 봄 3월 15일 문인 의거(義車) 등이 행장을 모아 엮어서 멀리 왕궁에 나아가 비명을 세워 불도(佛道)를 빛낼 것을 청하였다. 성상께서는 진종의 이치를 흠모하고 스승을 높이는 마음을 가긍히 여겨 담당 관사에 교를 내려 시호를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보림(寶林)이라고 정하여 그 선종을 포상하기를 예(禮)로써 하였다. 다음 날 또 미천한 신에게 조를 내려 비찬(碑讚)을 지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여 알리게 하시니 신은 황공하옵게도 명을 받들어 사실대로 기록하여 사(詞)를 지었다. 다만 삼가 임금의 뜻을 받들었으나 감히 문사들의 웃음거리를 피하리요. 사(詞)는 이렇다.
선심(禪心)이 정해져 있지 아니함이여! 지극한 이치는 공(空)에 돌아간다. 살아 있음이 유리와 같음이여! 유(有)와 무(無) 가운데 있도다. 신(神)도 통하여 비치지 못함이여! 귀신이 감히 부딪히랴. 지킴에 부족함이 없음이여! 베푸심이 끝이 없어라. 겁은 무수한 항사를 다함이여! 묘용이 그침이 없도다. (1)
한없이 넓은 로사나는 만물을 감싸고 기르나 어리석은 중생은 로사나의 율(律)을 어긴다. 두 몸이 이미 한 몸이거늘 다시 뉘가 부처이랴! 미혹하고 또 미혹함이여! 도(道)는 이에 다함이로다. (2)
위대하도다. 선사여! 해역(신라)에 태어나, 끝까지 보리를 익히고 은혜로운 덕을 청정 수행하여, 공(空)을 관(觀)하되 공을 떠나고 색(色)을 보아도 색이 아니니, 억지로 칭한다면 법인이라 할까. 얻은 바를 이름하기 어렵도다. (3)
유위(有爲) 세계는 수없는 인연이니, 대상이 오면 정신이 움직이고 바람이 일면 물결이 출렁인다. 모름지기 말같은 의식을 조련하고 원숭이같은 마음을 굴복시키니, 이로써 보배삼아 후세의 어진 이에게 베풀었다. (4)
반야의 배를 타고 애욕의 강물을 건너 피안에 이미 올랐으니, 부처님만이 헤아릴 수 있으리라. 우거(牛車)가 이미 도착하니 화택(火宅)은 허물어졌다. 법상(法相)은 비록 남아 있으나 철인(哲人)은 이미 떠나셨네. (5)
총림에 주인이 없으니 산문이 텅 빈 듯하구나 석장은 호랑이 떼를 내쫓으며 발우는 용의 무리에 던졌다. 오로지 남은 향화(香火)는 음성과 모습을 추모하고 생각할 뿐. 이 정석(貞石)에 새겨 법이 장차 빼어나기를 기린다. (6)
중화 4년(884) 갑진년 가을 9월 무오삭 19일 병자에 세우다. 머리에서 제 7행 선자(禪字) 이하는 제자 전병부시랑 입조사(入朝使) 전중대감(殿中大監)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언경(金彦卿)이 썼다. 흥륜사 승인 석현창(釋賢暢)이 글자를 새겼다.
판독문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2]
新羅國武州迦智山寶林寺諡普照禪師靈塔碑銘幷序
朝請郞守定邊府司馬賜緋魚袋臣金穎奉敎撰 儒林郞守武州昆湄縣令金薳奉敎書
聞夫禪境玄寂正覺希夷難測難知如空如海故龍樹師子之尊者喩芭蕉於西天弘忍惠能之祖師譚醍醐於震旦盖掃因果之跡離色相之鄕登大牛之車入罔象之」 域是以智光遠照惠澤遐流灑法雨於昏衢布慈雲於覺路見空者一息而越彼邪山有爲則永劫而滯于黑業矧乎末法之世象敎紛紜罕契眞宗互持偏見如擘水求」 月若搓繩繫風徒有勞於六情豈可得其至理其於衆生爲舍那舍那爲衆生衆生不知在舍那法界之中縱橫造業舍那亦不知衆生在苞含之內湛然常寂豈非迷耶」 知此迷者大不迷矣知其迷者惟我禪師乎或謂此說爲濩落之言吁道經云上士聞道崇而奉之中士聞道如存若亡下士聞道撫掌而笑不笑不足以爲」 道也此之謂矣禪師諱體澄宗姓金熊津人也家承令望門襲仁風是以慶自天鐘德從嶽降孝義旌表於鄕里禮樂冠盖於軒裳者也禪師託體之年尊」 夫人夢日輪駕空垂光貫腹因之驚寤便覺有懷及逾朞月不之誕生尊夫人追尋瑞夢誓禱良因膳徹腶脩飮斷醪醴胎訓淨戒騭事福田由是克解分蓐之憂允叶弄」 璋之慶禪師貌雄岳立氣潤河靈輪齒自然金髮特異閭里聲歎親戚咸驚從襁褓之年宛有出塵之趣登齠齔之歲永懷捨俗之緣二親知其富貴難留財色莫繫許其」 出家遊學策杖尋師投花山勸法師座下聽經爲業摳衣請益夙夜精勤觸目無遺歷耳必記常以陶冶麤鄙藻練僧儀積仁順而煩蠲除習虛靜而神通妙用超然出」 衆卓爾不群後以大和丁未歲至加良峽山普願寺受具戒一入壇場七宵行道俄有異雉忽爾馴飛稽古者曰昔向陳倉用顯覇王之道今來寶地將興法主之徵者」 焉初道儀大師者受心印於西堂後歸我國說其禪理時人雅尙經敎與習觀存神之法未臻其無爲任運之宗以爲虛誕不之崇重有若達摩不遇梁武也由是知時未」 集隱於山林付法於廉居禪師居雪山億聖寺傳祖心闢師敎我禪師往而事焉淨修一心求出三界以命非命以軀非軀禪師察志氣非偶素槩殊常付玄珠授法印至」 開成二年丁巳與同學貞育虛懷等路出滄波西入華夏參善知識歷三五州知其法界嗜欲共同性相無異乃曰我祖師所說無以爲加何勞遠適止足意興五年春二」 月隨平盧使歸舊國化故鄕於是檀越傾心釋敎繼踵百川之朝鼇壑群嶺之宗鷲山未足爲喩也遂次武州黃蘭若時大中十三禩龍集于析木之津」 憲安大王卽位之後年也」 大王聆風仰道勞于夢魂願闢禪扉請入京轂夏六月敎遣長沙縣副守金彦卿賷茶藥迎之師以處雲巖之安兼屬結戒之月託淨名之病陳六祖之辭冬十月」 敎又遣道俗使靈巖郡僧正連訓法師奉宸馮瑄等宣諭綸旨請移居迦智山寺遂飛金錫遷入山門其山則元表大德之舊居也表德以法力施于有政」 是以建元二年特敎植長生標柱至今存焉」 宣帝十四年仲春副守金彦卿夙陳弟子之禮嘗爲入室之賓減淸俸出私財市鐵二千五百斤鑄廬舍那佛一軀以莊禪師所居梵宇敎下望水里南等宅其出」金一百六十分租二千斛助充裝食芳功德寺隸宣敎省咸通辛巳歲以十方施資廣其禪宇慶畢功日禪師莅焉虹之與蜺貫徹堂內分輝耀室渥彩燭人此乃堅牢告祥」 娑迦表瑞也廣明元年三月九日告諸依止曰吾今生報業盡就木成汝等當善護持無至隳怠至孟夏仲旬二日雷電一山自酉至戌十三日子夜上房地震及天曉」 右脇臥終享齡七十有七僧臘五十二於是弟子英惠淸奐等八百餘人義深考妣情感乾坤追慕攀號聲動溪谷以其月十四日葬於王山松臺壘塔安厝嗚乎禪師名」 留於此魂魄何之生離五濁超十八空樂寂滅而不歸遺法林而永秀豈唯濟生靈於沙界實亦裨」 聖化於三韓禮云別子爲祖康成注云子若始來在此國者後世以爲祖是以達摩爲唐第一祖我國則以儀大師爲第一祖居禪師爲第二祖我師第三祖矣中和三年」 春三月十五日門人義車等纂輯行狀遠詣王居請建碑銘用光佛道」 聖上慕眞宗之理憫嚴師之心敎所司定諡曰普照塔號彰聖寺額寶林褒其禪宗禮也翌日又詔微臣修撰碑讚垂裕後人臣兢惶承命直筆爲詞」 但以供奉宸衷敢避文林嗤哂詞曰禪心不定兮至理歸空如活瑠璃兮在有無中神莫通照兮 鬼其敢衝守無不足兮施之無窮劫盡恒沙兮妙用靡終(其一)廖廓舍那苞育萬物蠢蠢衆生違舍那律二旣同」 體復誰是佛迷之又迷道乃斯畢(其二)大哉禪師生乎海域克鍊菩提精修惠德觀空離空見色非色强稱爲印難名所得(其三)有爲世界無數因緣境來神動風起波翻須調」 義馬勤伏心猿以斯爲寶施于後賢(其四)乘波若舟涉愛河水彼岸旣登唯佛是擬牛車已到火宅任燬法相雖存哲人其萎(其五)叢林無主山門若空錫放衆虎鉢遣群龍唯」 餘香火追想音容刊此貞石紀法將雄(其六)」
中和四年歲次甲辰季秋九月戊午朔旬有九日丙子建」 從頭第七行禪字已下弟子前兵部侍郞入朝使殿中大監賜紫金魚袋金彦卿書興輪寺僧釋賢暢刻字」
탁본
- BHST Borimsa Bojo stele rub.jpg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번호: 덕수(德壽)-005770-000[3]
- BHST Borimsa Bojo stele rub-1.jpg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번호: 덕수(德壽)-005833-000[4]
주석
- ↑ 온라인 참조: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온라인 참조: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