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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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한자명칭 訓民正音 解例本
로마자명칭 Hunminjeongeum Haeryebon
영문명칭 Explanation and examples of Korean phonetics and phonology for the people
작자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간행시기 1446년
소장처 간송미술관
문화재지정사항 국보 제70호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1997년 등재)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22.6×17.2㎝
판본 목판본
수량 1책
표기문자 한자, 한글


정의

훈민정음을 한문으로 해설한 책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한문으로 해설한 책이다. 전체 33장을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수록했고, 제2부는 훈민정음 해례를 26장 51면에 실었다.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수록하고, 그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이라 명시하였다. 훈민정음은 ‘예의(例義)’와 ‘해례(解例)’ 로 나뉘는데, 창제 이유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자음과 모음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해례집현전 학사들이 지었다. 서문을 포함한 예의는 간략해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 실려 있으나, 창제 원리가 담긴 해례부분은 존재가 알려지지 않다가 1940년에야 발견되었다.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1]

훈민정음의 편찬과 구성

1443년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훈민정음의 기본 원리와 개념을 소개하고, 이것을 간행할 것이라 공표하였다.[2] 이후 3년간 집현전 학자들의 내용 보충과 여러가지 연구를 걸쳐서,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3] 그 구조를 보면 전체 33장을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수록했고, 제2부는 훈민정음 해례를 26장 51면에 실었다.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수록하고, 그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이라 명시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연원

간송본은 현재 실존하는 훈민정음 판본이다. 간송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1940년경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어, 고(故) 전형필이 이를 입수하고 전형필간송미술관을 세워 원본을 보관하게 되었다."[4] 라는 정도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최근 건국대 박종덕 교수가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정 연구」란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어떻게 유출되어 간송미술관에 전해졌는지 그 세밀한 과정이 알려지게 되었다. 해당 논문의 내용에 의하면 원래 간송본광산 김씨 문중의 종가 긍구당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해당 문중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장인 김응수 몰래 훈민정음 해례본을 빼내어 자신의 자택에 숨기게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스승이었던 김태준과 친구 관계였던 황의돈을 통해 전형필을 소개받게 되었다. 전형필은 이미 김태준을 통해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당시 화폐 1만원의 가격으로 이용준을 통해 훈민정음 해례본을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가격이 1천원 정도였음을 고려할 때, 일반 집 가격의 10배 액수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매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5]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사건

상주본은 2007년 경북 상주에서 고서적 수집상 배익기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집(경북 상주시 낙동면)을 수리하다가 상주본을 발견했다" 라고 하면서 상주본을 처음 외부에 공개하였다. 상주본은 특히 간송본과 매우 유사하며 서문 4장과 뒷부분 한장이 유실 되었지만 보존 상태는 간송본보다 더 좋았다. 그리고 간송본에서 보이지 않았던 당시 연구자들의 주석이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배익기가 국가를 상대로 1000억원 규모의 큰 돈을 요구하여 정부가 선뜻 매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이로부터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골동품 수집상 조영훈이 말하기를, "7월26일 배씨가 가게에서 30만원을 주고 고서적 두 박스를 사가면서 나무궤짝 위에 놓여있던 상주본을 훔쳐갔다" 라고 하면서 자신이 원 소유주라 주장하는 일이 발행하였다. 이로 인해 상주본은 기나긴 법정 공방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계속 되는 법정 공방 속에서 배익기상주본을 은밀히 감추어 버렸고, 그 결과 현재 상주본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법정 싸움이 여론적 관심을 얻게 되자 검찰은 더욱 강도높은 수사를 진행하였고, 결과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상주본은 본래 두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경북 안동시 서후면 자품리에 있는 광흥사 불상 안에 있었던 것으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검찰도굴꾼 서씨에게서 '1999년 광흥사 불상에서 상주본 및 여러 고서적을 빼내어, 이것을 조영훈에게 500만원에 팔았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다. [6] 이 진술을 토대로 검찰배익기를 고소하였고, 배익기 집을 압수 수색하였으나 상주본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조영훈은 사망하였고, 배익기는 무혐의로 풀려났다.[7]그 후 배익기는 조용히 지내다가, 자기가 상주시 국회의원이 되면 상주본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하며, 2017년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낙마하였다.[8][9]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세종 훈민정음 A는 B를 창시했다 1443년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와 관련이 있다
집현전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를 주관하였다 1446년
정인지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1446년
신숙주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1446년
성삼문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1446년
최항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1446년
박팽년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1446년
강희안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1446년
이개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1446년
이선로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1446년
정인지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를 저술하였다 1446년
신숙주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를 저술하였다 1446년
성삼문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를 저술하였다 1446년
최항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를 저술하였다 1446년
박팽년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를 저술하였다 1446년
강희안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를 저술하였다 1446년
이개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를 저술하였다 1446년
이선로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를 저술하였다 1446년
세종 훈민정음 예의편 A는 B를 저술하였다 1446년
훈민정음 예의편 세종실록 A는 B에 포함된다
훈민정음 예의편 훈민정음 언해본 A는 B에 포함된다
훈민정음 언해본 월인석보 A는 B에 포함된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에 포함된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유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A는 B와 관련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간송미술관 A는 B에 보관되었다 1940년-현재
전형필 간송미술관 A는 B를 건립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긍구당 A는 B에 보관되었다 조선시대-1940년
긍구당 광산 김씨 A는 B와 관련이 있다
광산 김씨 김응수 A는 B를 포함한다
김응수 김남이 A는 B의 어버이다
김남이 이용준 A는 B의 아내이다
이용준 김태준 A는 B의 제자이다
김태준 황의돈 A는 B와 교유하였다
황의돈 전형필 A는 B와 교유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에 포함된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사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A는 B와 관련이 있다
광흥사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A는 B를 소장하였다 조선시대-1999년
도굴꾼 서씨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A는 B를 소장하였다 1999년
조영훈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A는 B를 소장하였다 1999년-2007년
배익기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A는 B를 소장하였다 2007년-현재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43년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간행되었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이 발견되었다
1962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국보 70호로 지정되었다
1997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93845 126.996834 훈민정음 해례본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쪽.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
  2. 『세종실록』 권102, 세종25년(1443) 12월 30일(경술),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세종실록』 권113, 세종28년(1446) 9월 29일(갑오),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훈민정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5. 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 과정 연구 -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학』권31, 2006, p.171~192.
  6. 황경상,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빈손’ 소유권만 국가에 귀속 ‘이상한 일’, "『경향신문』, 2012년 05월 06일자 기사."
  7. 김일우, "1000억 주면 '훈민정음 상주본' 내놓겠다고?",『한겨례』, 2015년 10월 09일자 기사.
  8. 황정일,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 배익기씨, 국회의원 재선거 예비후보 등록, "『리셋 코리아』, 2017년 02월 28일자 기사.
  9. 이경민,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한 배익기씨, 불에 탄 훈민정음 상주본 사진 공개, "『조선일보』, 2017년 04월 10일자 기사.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 과정 연구 -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학』권31, 2006, p.171~192.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