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陜川 般若寺址 元景王師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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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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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for |
한자 | 陜川 般若寺址 元景王師碑 |
이칭 |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 元景王師碑) |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치인리 10)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128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찬자 | 김부일(金富佾) |
서자 | 이원부(李元符) |
각자 | 김윤(金允)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낙진(樂眞) |
건립연대 | 1125년(인종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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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반야사지(般若寺址)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승려 원경왕사 낙진(元景王師 樂眞, 1050-1119)의 탑비.
내용
개요
비신 높이 228㎝, 너비 105㎝, 두께 12㎝. 탑비는 귀부(龜趺)와 비신(碑身)과 개석(蓋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반야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광복 후 해인사(海印寺)로 옮겨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1968년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에 중건하였다.[1]
원경왕사(元景王師)는 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에게 학문을 배우고,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을 따라 송나라로 건너가 정원(淨源)에게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의천을 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에서 속장경(續藏經)을 판각할 때 교정을 보았던 승려이다.[2] 1119년 귀법사(歸法寺)에서 입적하였으며, 1124년 원경왕사의 문인 각순(覺純) 등이 비의 건립을 왕에게 청하자 1125년(인종 3)에 비가 건립되었다.[3] 전액(篆額)에는 '증시원경왕사비명(贈諡元景王師碑銘)'이라고 쓰여있다.
비문은 김부일(金富佾)이 짓고, 이원부(李元符)가 썼으며, 김윤(金允)이 글씨를 새겼다. 글씨는 해서체로 쓰여졌으며, 고려시대 비문의 해서가 대부분 구양순(歐陽詢) 계통임에 비하여 이 비문은 우세남(虞世南)의 필체를 따르고 있다. 필획의 부드러운 흐름과 여유 있는 짜임새가 돋보인다.[4]
귀부(龜趺)와 비신 위에 이수(螭首)가 아닌 가첨석(加添石)을 얹은 독특한 비이며 비신(碑身) 테두리에 당초문과 용봉(龍鳳) 무늬를 새긴 것이 특징적이다.[5]
비문
앞면
비가 많이 마모되어 중간에 내용을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원경왕사(元景王師)는 고려 중기 화엄종의 고승으로 비 제목에 고려 화엄종의 제4대 왕사라 명기하고 있다. 원경왕사는 경덕국사의 제자로 동문인 대각국사에게서도 수학하였으며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다녀 왔다. 국가의 천재지변을 막는 행사를 주관하고 교장(敎藏) 사업에도 참여한 후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향년 70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여 개경의 귀법사에서 다비한 후 반야사에 안치하여 비를 세웠다.[6]
뒷면
음기(陰記)에는 원경왕사(元景王師)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親承敎訓者)로 수좌 1인과 삼중대사 2인 및 44인의 중대사, 가풍을 선양한 자(揚法化者)로 삼중대사와 중대사 수십인, 시봉하며 받든 자(奉待甁巾者)로 중대사 수십인, 운영을 도운 자(補翼事務者)로 중대사 수십 인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직명에 따라 문도를 구분하였음을 밝혔다.[7]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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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김세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낙진", 두산백과
- ↑ 김세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세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반야사원경왕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 ↑ 반야사원경왕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 ↑ 반야사원경왕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