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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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도감(敎藏都監)
이칭별칭 속장경(續藏經)
설치폐지 1091년-1101년
주요업무 장경 판각(板刻)



정의

고려 때, 교장(敎藏)의 판각을 담당한 기관.[1]

내용

송(宋)나라에 다녀온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요청에 따라 1086년(선종 3) 개성 흥왕사(開城 興王寺)에 설치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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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大覺國師) 왕후(王煦)는 자(字)가 의천(義天)으로, 송(宋) 철종(哲宗)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자 〈의천〉으로 행세하였다.···
···왕후는 불전(佛典)과 경서(經書) 1,000권(卷)을 바치고, 또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둘 수 있기를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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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사』 열전 권제3, 「종실」.[3]


의천은 고려 국내는 물론 송과 요, 일본의 불교학 연구서들까지 널리 수집하였는데, 그것을 간행하기 위해 1090년(선종 7)에 편찬한 목록집이 『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新編諸宗敎藏總錄)』이다. 이어서 1901년부터 10여 년에 걸쳐서 진행된[4] 교장 간행사업은 《교장(敎藏)》이라 하는 1,010부, 4,740여 권의 불전(佛典)을 조판(彫版) 및 간행하였다. 현존하는 교장도감 간행본으로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40권 외에 20여 종이있다.[5]

교장의 간행은 한역(漢譯) 불경을 바탕으로 성립된 동아시아 불교의 당시까지 교학 연구 성과가 집대성된 것으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교장은 불교의 거의 모든 학파의 논서를 포함하고 있어, 의천의 관심사가 화엄을 중흥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대승과 소승은 물론 천태를 포함한 선종까지 아울러 고려에서 불교를 융성하게 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6]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교장도감 개성 흥왕사 A는 B에 있었다
의천 교장도감 A는 B를 설치하였다
교장 교장도감 A는 B와 관련있다

주석

  1. "교장도감", 『두산백과』online.
  2. 박상국, "교장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문종 왕자 대각국사 왕후", 『고려사』 열권 권제3, 「종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김남윤, "의천(大覺國師義天)", 『한국사 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박상국, "교장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김남윤, "의천(大覺國師義天)", 『한국사 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 김태, 『한국불교사정론』, 불지사, 1997.
  • 박상국,천혜봉, 『보조사상 11』, 보조사상연구원, 1998.
  • 조명기, 『고려대각국사(高麗大覺國師)와 천태사상(天台思想)』, 동국문화사, 1964.
  • 김남윤, "의천(大覺國師義天)", 『한국사 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박상국, "교장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문종 왕자 대각국사 왕후", 『고려사』 열권 권제3, 「종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교장도감", 『두산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