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의 혼례식 - 왕실의 혼례 절차와 복식 (표본기사)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 |
주제 | 가례(嘉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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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주체 | 가례도감(嘉禮都監) |
의례담당자 | 신만(申晩) |
작성지역 | 한성부 |
작성시기 | 1759년(영조 35년) |
소장처(원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어람용 상책), 국립중앙박물관(어람용 하책), 규장각한국학연구원(태백산) |
판본 | 필사본 |
표기문자 | 한자, 이두 |
수량 | 2책 288장(상책 150장, 하책 138장): 어람용/2책 291장(제1책 152장, 제2책 139장): 태백산 |
도설 | 18면(제1책 4면, 제2책 14면)(채색), 반차도 50면(제2책)(채색) |
목차
개요
1759년 6월, 창경궁에서 66세의 영조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1759)에 담긴 영조-정순왕후의 혼례 기록은 조선 후기 왕실의 혼례 절차와 왕실의 사람들이 입었던 복식에 대해 알게 한다.
내용
가례도감 의궤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는 가례도감에서 편찬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1759)에서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가례(嘉禮)는 오례의 하나로 왕실의 경사를 이르는 말이었다. 가례에 속하는 의식을 주관하는 기관이 가례도감이고, 이 가례도감에서 편찬한 각종 의례의 시행 기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례도감의궤』이다.
원래 가례는 국혼(國婚)·즉위(卽位)·책봉(册封)·사연(賜宴)·노부(鹵簿) 등의 의식예법을 포함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기록된 『가례도감의궤』는 모두 왕·왕세자의 혼례에 관한 것이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가례도감의궤』는, 왕의 가례 9건, 왕세자의 가례 9건, 왕세손의 가례 1건, 황태자의 가례 1건이 있으며, 그 지위에 따라 격을 달리하여 행해졌다. 여기에서는 왕의 가례 중 하나인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1759)를 통해 조선 후기 재정비된 조선 왕실 혼례식의 전모를 파헤져 보고자 한다.
영조-정순왕후 혼례 절차
영조의 만혼에 대한 의론
1757년 2월 15일(음력),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였다. 삼년상을 치루고 난 뒤인 1759년 5월 3일, 대신과 예조당상은 오래도록 국모의 자리를 비워놓을 수 없다며 새로운 중전을 책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영조는 이를 거절하였다.[1] 그러나 동월 6일, 영조는 중전의 자리가 비었음에도 임금이 늙어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부사(領府事)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의 관직을 박탈하여 한양 밖으로 쫒아버리고(門外黜送) [2] 바로 다음날인 7일, 혼례(婚禮)의 대사(大事)에 대한 의사를 밝히고 있어[3]
간택(揀擇)과 육례(六禮)
신하들의 강권 때문인지 사실은 영조의 계비를 얻고싶은 마음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영조의 재혼 의지 표명 이후 간택에서 혼례식까지 혼례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었다.[4]
혼례 절차의 첫 단계는 전국의 사대부가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리는 것이다.
금혼령이 내려지자 예조에서 해당하는 사대부가 처녀들의 처녀단자를 모아 간택단자를 만들어 올렸다.
1759년 금혼령 및 간택단자 | 1759년 6월 2일 초간택 | 1759년 6월 4일 재간택 | 1759년 6월 9일 삼간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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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김한구(金漢耉, 경주김씨)의 딸 현감 김노(金魯, 연안김씨)의 딸 유학 어석주(魚錫疇, 함종어씨)의 딸 유학 윤득행(尹得行, 해평 윤씨) 전 주서 김재록(金載祿, 연안 김씨)의 딸 생원 유간(兪墾, 기계 유씨)의 딸 |
유학 김한구의 딸 현감 김노의 딸 유학 윤득행의 딸 |
유학 김한구의 딸 |
혼례식은 왕비의 간택 이후, 육례에 따라 본격적인 의식 절차가 진행된다. 여섯 가지 예법 즉 육례(六禮)는 국왕이 혼인을 청하는 의식인 납채(納采), 성혼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징(納徵), 책비(冊妃)와 친영(親迎)의 날짜를 잡는 고기(告期),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冊妃), 국왕이 별궁으로 가서 신부를 모셔오는 친영(親迎), 국왕과 왕비가 함께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는 의식인 동뢰(同牢)로 구성된다. 1759년 6월 13일 : 납채례
1759년 6월 17일 : 납징례
1759년 6월 19일 : 고기례
1759년 6월 20일 : 책비례
1759년 6월 22일 : 친영례, 동뢰연
1759년 7월 15일 : 묘현례
영조-정순왕후 혼례식 모습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인은 재혼이었으므로 전례보다 간소하게 치뤘다고 한다. 그럼에 불구하고 이 때 혼수비용으로 쓰인 예산은 오늘날의 화폐로 환산할 경우 7억 원에 가까운 금액이었다고 한다. (영조 25년(1749년)에 편찬된 '국혼정례'에 따르면 .... ) 이 예식에 쓰인 혼례 물품과 참례자들의 복식이 가례도감의궤에 그림으로 묘사되어 이 예식의 성대함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반차도
왕이 왕비의 임시 거처인 별궁으로 나아가 궁으로 모시고 돌아오는 친영의 행렬 장면은 가례도감의궤 말미에 친영 반차도로 기록되어 있다. 친영 행렬의 구성은 크게 선도 행렬, 어가 행렬, 왕비 행렬, 수행 행렬의 순으로 나눌 수 있다. 친영의 앞부분을 구성하는 선도행렬에는 왕을 상징하는 장엄하고 화려한 의장물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 호위무사들이 수행하는 어가 행렬이 이어진다. 뒤이어 왕비 책봉에 관련된 교명문, 금보, 옥책, 명복 등을 실은 가마가 따르고, 이어 왕비의 가마와 이를 따르는 수행인물들이 이어진다. 후반부는 행차를 마무리하는 부분으로, 후미에서 행렬을 경호하는 인물들이 따른다. 친영을 왕실 가례의 핵심 장면으로 중히 여겼기에 가례도감의궤 반차도는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맡아 그렸고, 귀한 천연 물감을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특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감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혼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복식과 가마ㆍ의장기ㆍ각종 기물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으며 반차도 VR을 통해 보여줄 예정...
영조, 정순왕후의 혼례복
영조와 정순왕후는 육례(六禮)의 혼례 절차에 맞추어 그 예법에 따른 옷을 입었다. 가례도감의 복식 기록을 통해 왕실 혼례 의상의 화려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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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출처/전거
-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더 읽을거리
- 영조-정순왕후의 혼례에 관한 자세한 지식 ☞ 임민혁, 『조선국왕 장가 보내기』(글항아리, 2017).
유용한 정보
- "왕비 및 왕세자빈 간택 절차", 『네이버 블로그 - 수훈이의 역사 공간』(작성일: 2017년 03월 08일).</ref>
주석
- ↑ "대신과 예조 당상이 곤위의 가례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3일 임오 4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online . - ↑ "인원 왕후의 부묘례를 행하고, 조재호를 부처하고 유척기를 문외 출송토록 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6일 을유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online . - ↑ "혼례의 대사에서 주원의 동뢰 연상 이외에는 모든 반상을 제거토록 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7일 병술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online . - ↑ "왕비 및 왕세자빈 간택 절차", 『네이버 블로그 - 수훈이의 역사 공간』, 작성일: 2017년 03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