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린지서(朱璘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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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의 사적을 잘못 서술했다는 이유로 영조 때 금서로 지정된 중국 주린의 저서.

개설

1771년(영조 47) 중국의 주린(朱璘)이 쓴 저서에 조선 왕실의 계보를 무함하는 불온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에 크게 노한 영조는 문제의 책을 들여온 사신들의 관직을 빼앗았다. 그리고 『강감회찬』을 비롯해 주린이 지었다고 알려진 『명기집략(明紀輯略)』·『봉주강감(鳳州綱鑑)』·『청암집(靑庵集)』 등과, 주린이 참고한 책들까지 모조리 수거해 불태우게 하였다.

그 중에서 『명기집략』은 종계(宗系)를 잘못 적은 것 때문에 가장 문제가 되었다. 『명기집략』을 구입한 양반 이희천(李羲天)과 그와 거래하던 책쾌 배경도(裵景度)는 참수한 뒤 강변에 효시(梟示)하고, 그 처자식들은 모두 흑산도로 보내 관노비로 삼게 했다. 영조는 사건을 종결한 뒤, 신하들과 함께 『명기집략』의 오류를 밝혀 종계를 바로잡은 것을 축하하는 시문을 지어 『속광국지경록(續光國志慶錄)』을 편찬했다(『영조실록』 47년 10월 18일).

역사적 배경

주린의 저서 중 『명기집략』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불온서적으로 인식되었다. 홍대용은 북경에 갔다가 그 책을 접하고는, 그 내용의 부당함을 밝히는 글을 중국의 지식인 반정균(潘庭筠)에게 전달한 바 있다. 그 후 중국에서는 이런 건의를 받아들여 1757년(영조 33)에 그 책을 불온서적으로 지목하고, 간행본은 물론 판목까지 수거해 없애 버렸다. 그러므로 『명기집략』 사건이 터진 1771년(영조 47)에 중국에서는 오히려 그 책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문제는 훨씬 이전부터 조선에 들어와 유통된 책이었다. 그 당시 이희천이 극형을 당한 것은 『명기집략』을, 그것도 책을 구입한 뒤 오랫동안 집에 보관해 두었다는 이유가 컸다.

발단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낸 박필순(朴弼淳)이 1771년에 영조에게 한 편의 상소를 올렸다. 새롭게 나온 주린의 『강감회찬』에 조선 왕실의 계보를 무함하는 불온한 내용이 또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영조실록』 47년 5월 20일). 선왕에 대한 잘못된 언급을 바로잡는 일로 골치를 앓아 오던 영조는 분기를 참지 못했다. 더욱이 주위 신하들의 미온적인 태도에 영조는 더욱 화를 냈다.

경과

이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다. 영조는 우의정김상철(金相喆)을 청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주린을 처벌할 것과 『명기집략』을 훼판하고 소각할 것을 요구하고, 이 책을 수입해 온 세 사신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또 민간에 소장된 『명기집략』을 자진해서 헌납케 했다. 이때 책을 반납한 이들은 삼정승과 판서 등을 비롯해 무려 75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바친 서책도 다양해서 10여 종에 이르렀다.

이후 사건은 서적상(書籍商)인 책쾌의 체포 및 신문으로 확대되었다. 영조는 왕실의 정통성을 뒤흔들 수 있는 불온한 책이 책쾌에 의해, 그것도 전문적으로 유통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조선 사대부는 모두 책쾌를 알고 있다."면서 그날 안으로 도성의 모든 책쾌를 잡아들일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미 책쾌들이 잠적해 버린 뒤라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자 급기야 그 책임을 물어 포도대장을 파면하고, 그 자리에 새로 이장오(李章吾)를 임명해 책쾌 검거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내보였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책쾌들이 체포되었는데, 그중 『명기집략』을 거래한 책쾌 8명은 흑산도로 보내 종으로 삼게 하였다. 책을 산 이희천과 책쾌 배경도는 참수한 뒤 강변에 사흘 동안 효시하고, 그 처자식들은 흑산도로 보내 관노비로 영속(永屬)하게 하였다(『영조실록』 47년 5월 26일). 『봉주강감』과 『명기집략』 외에 일반 서적을 소지했던 이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책쾌는 예외 없이 처벌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책쾌에게서 『명기집략』을 구입한 혐의로 조사를 받던 정득환(鄭得煥)의 입에서 『청암집』이란 책이 새롭게 거론되면서 또다시 피바람이 일게 되었다. 영조는 나머지 책쾌마저 수색해 체포하게 하고, 중국에서 책을 들여온 역관들까지 불러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결국 정득환과 그와 연관된 인물들은 모두 효시를 당하였고(『영조실록』 47년 6월 1일), 조사는 『청암집』의 수색에 초점이 모아졌다. 이때 『청암집』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역관과 책쾌의 수가 100명에 이르렀다(『영조실록』 47년 6월 2일).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 가던 이 사건은 채제공(蔡濟恭)이 『청암집』이란 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왕에게 진언하면서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역관들도 『봉주강감』과 『명기집략』을 구매하지 않았다고 거듭 주장함에 따라, 역관과 책쾌의 연관성은 끝내 드러나지 않은 채 조사가 종결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휴머니스트, 2007.
  • 유재건, 實是學舍古典文學硏究會 譯註, 『里鄕見聞錄』, 민음사, 1997.
  • 이민희, 『16~19세기 서적중개상과 소설·서적 유통관계 연구』, 역락, 2007.
  • 이민희,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 글항아리, 2008.
  • 이중연,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혜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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