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이씨(暎嬪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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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96년(숙종 22)~1764년(영조 40) = 69세].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英祖)의 후궁이자, 추존왕 장조(莊祖)의 어머니. 궁호는 선희(宣禧)이고, 시호는 의열(義烈)이었으나 소유(昭裕)가 추가되었다.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증찬성(贈贊成)이유번(李楡蕃)이고, 어머니는 한양 김씨(漢陽金氏)김우종(金佑宗)의 딸이다. 영조가 가장 총애하였던 후궁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의 후궁

이영빈(李暎嬪)은 16세가 되던 1701년(숙종 37) 입궁하여 궁녀가 되었다. 그러다가 영조의 승은을 입고 1726년(영조 2) 11월 숙의(淑儀)에 봉해졌는데, 너무 빠른 처사라는 비판이 있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2년 11월 16일, 영조 2년 12월 13일]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727년(영조 3) 이영빈은 영조와의 사이에서 첫 번째 자식인 화평옹주(和平翁主)를 낳았고, 이어 그해 10월 귀인(貴人)에 봉해졌으며, 2년 후인 1728년(영조 4) 11월에는 정1품인 영빈(暎嬪)의 품계에 올랐다.[『영조실록』영조 6년 11월 27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4년 10월 8일] 이는 영조의 후궁 가운데에 가장 높은 품계라 할 수 있는데, 같은 정1품의 이정빈(李靖嬪)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후에 추증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이영빈은 경종(景宗)의 3년상이 끝난 지 3개월만에 숙의에 봉해졌고, 경종의 계비(繼妃)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의 국상 중에 영빈이 되었다. 또한 숙의에서 귀인을 거쳐 영빈이 되기까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조의 이영빈 총애를 짐작할 수 있다.

화평옹주를 낳은 후 이영빈은 3명의 옹주를 더 낳았으나, 봉작(封爵)도 되기 전에 셋 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733년(영조 9) 화협옹주(和協翁主)를 낳았는데, 1728년에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왕자가 태어나지 못하여 세자의 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왕자가 아닌 옹주가 태어난 것에 대하여 영조를 비롯한 대신들의 안타까움이 매우 컸다.[『영조실록』영조 9년 3월 8일]

그리고 이로부터 2년 뒤인 1735년(영조 11) 1월 40세의 나이로 이영빈은 원자(元子)를 낳았다. 이 원자가 바로 훗날의 장조, 즉 사도세자(思悼世子) 혹은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불리는 왕자였다.[『영조실록』영조 11년 1월 21일] 원자는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영조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1년 1월 21일, 영조 12년 3월 15일] 그리고 1738년(영조 14) 이영빈은 자신의 마지막 자식인 화완옹주(和緩翁主)를 낳았는데, 훗날 화완옹주는 자신의 양자인 정후겸(鄭厚謙)과 함께 동복 오빠인 장조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정조(正祖)의 즉위 과정에 개입하여 많은 잡음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1748년(영조 24) 6월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났고, 4년 후인 1752년(영조 28) 11월 화협옹주 또한 세상을 떠나면서 이영빈이 낳은 1남 6녀 가운데 5명의 옹주가 죽고 장헌세자와 막내 딸 화완옹주만이 남게 되었다.

한편 이영빈은 후궁으로 있으면서 『여범(女範)』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의 『열녀전(烈女傳)』을 인용한 여성들의 규훈서로서, 한글로 작성되어 있다.

장헌세자의 죽음

이영빈이 낳은 아들 장헌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총명하여 아버지 영조의 기대를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 영조는 자신의 체력이 약해져서 정양이 필요하다며 장헌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영조 25년 1월 27일] 사실 이것은 영조의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정국 운영을 익히게 하기 위한 목적이 더욱 컸다. 특히 노론(老論)소론(少論)의 첨예한 대립 속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탕평(蕩平)의 정치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므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장헌세자가 정국을 운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정사 처리를 두고 영조와 장헌세자의 사이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외척 가운데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세력과 이를 견제하는 세력들 사이에 대립은 장헌세자의 상황을 더 불리하게 만들었다. 1759년(영조 35) 영조의 계비(繼妃)가 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耈) 등이 견제 세력과 손을 잡고 세자의 비행을 들추며 홍봉한 세력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홍봉한 세력도 처음에는 세자의 비행을 감쌌으나, 시간이 갈수록 세자의 비행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세손의 지위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1762년(영조 38) 김한구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장헌세자의 비행(非行)을 폭로하면서 영조와 장헌세자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영조실록』영조 38년 5월 22일]

이렇듯 영조와 장헌세자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이영빈의 입장도 난처해졌다. 결국 나경언의 폭로 후 이영빈은 영조를 찾아가 울며 장헌세자가 병을 앓고 있으니, 임금을 보호하고 세손(世孫 : 정조(正祖))을 건져 종사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대처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영조실록』영조 40년 9월 26일, 『한중록(閑中錄)』] 아울러 세손과 세손의 어머니, 즉 혜경궁홍씨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은 홍봉한의 견제 세력들의 공격이 장헌세자뿐만 아니라 세손에게까지 미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한중록』] 그리고 얼마 후 영조는 장헌세자를 폐하였고, 이후 장헌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영조실록』영조 38년 윤5월 21일] 발인 당시 이영빈은 아들의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으며, 또한 자식에게 못할 짓을 하였으니 자신의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며 고통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영조는 장헌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세자의 지위를 회복시켰으며, 동시에 혜경궁홍씨에게도 ‘혜빈(惠嬪)’이라는 시호를 내려 세자빈으로의 신분을 회복시켰다.[『영조실록』영조 38년 윤5월 21일] 그리고 2달 여 후에 영조는 세손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어 1764년(영조 40) 왕세자를 자신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하였다.[『영조실록』영조 40년 2월 20일]

그로부터 5달 후인 그해 7월 이영빈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영조는 후궁 일등의 예로 장사를 치르도록 하였다.[『영조실록』영조 40년 7월 26일] 이어 왕세자에게 장헌세자가 세상을 떠날 당시 이영빈이 백세의 의리를 세웠다며, 할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종사의 대의를 위하여 이영빈을 의열(義烈)이라 표시하였다고 밝혔다.[『영조실록』영조 40년 9월 26일] 그리고 이듬해인 1765년(영조 41) 영조는 정식으로 이영빈에게 의열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이에 이영빈의 무덤과 사당은 의열묘(義烈墓)와 의열궁(義烈宮)이라 불리게 되었다.[『영조실록』영조 41년 7월 11일]

묘소와 후손

이영빈의 사당인 의열궁은 한양의 순화방(順化坊), 현재의 종로구 신교동에 조성되었다. 이후 묘호와 궁호가 의열로 같은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때 정조가 의열의 뜻을 생각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두렵다며 장헌세자의 일을 넌지시 언급하였다. 이에 의열궁의 궁호는 선희궁(宣禧宮)으로 바뀌었다.[『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12년 12월 26일] 이후 1870년(고종 7) 선희궁은 장희빈(張禧嬪)과 성의빈(成宜嬪), 그리고 이정빈의 신주와 함께 육상궁(毓祥宮)의 별묘(別廟)로 옮겨졌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7년 1월 2일] 그러다가 1897년(고종 34) 선희궁의 신주는 다시 선희궁으로 돌려졌으나, 1908년(순종 2년) 개정한 제사 제도의 칙령에 따라 다시 다른 후궁들의 신주들과 함께 육상궁으로 옮겨졌다.[『고종실록』 고종 34년 6월 25일, 『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1년 7월 23일] 이어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육상궁에 추가되면서 이곳은 7개의 신주를 모셨다는 의미로 ‘칠궁(七宮)’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2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선희궁터는 1975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32호로 지정되었다.

의열묘는 양주군 연희면,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안에 조성되었다. 1899년(고종 36) 고종은 이영빈이 추존왕 장조의 어머니라고 하여 의열묘에서 수경원(綏慶園)으로 원호(園號)를 격상시켰으며, 소유(昭裕)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고종실록』 고종 36년 12월 6일] 그러다가 수경원은 1968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으로 이장되었으며, 정자각과 비각은 연세대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다. 수경원은 1970년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수경원을 이장하는 가운데 백자 및 묘지(墓誌), 명기(明器), 석함 등이 출토되었는데, 연대를 확인할 수 있으며 제작 수준이 높고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왕실 유물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201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311호로 지정되었다.

이영빈은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두었는데, 1남은 장헌세자이다. 그리고 1녀는 화평옹주로 금성위(錦城尉)박명원(朴明源)과 혼인을 하였으며, 2녀와 3녀, 그리고 4녀는 봉작도 받기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어 5녀는 화협옹주로 영성위(永城尉)신광수(申光綏)와 6녀인 화완옹주는 일성위(日城尉)정치달(鄭致達)과 각각 혼인을 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순종실록(純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한중록(閑中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민족문화대백과』
  •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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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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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경, 「『여범』의 독해 방식 연구」, 『여성문학연구』28, 한국여성문학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