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梁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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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0(선조 23)~1650(효종 1) = 61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의 문신.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순수(順受), 또는 임천(任天)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거주지는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지낸 양홍주(梁弘澍)이며,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현감(縣監)이사민(李師民)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양희(梁喜)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양응곤(梁應鵾)이다. 정인홍(鄭仁弘)의 처질(妻姪)이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선조~광해군 시대의 활동

1602년(선조 35) 13세에 아버지의 명으로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21세가 되던 1610년(광해군 2)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와 그의 아들 김백함(金白緘)이 광해군의 동생인 순화군(順和君)의 양자 진릉군(晋陵君)을 받들어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김직재의 옥(獄)>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김백함의 초사(招辭)에 양원(梁榞)의 이름이 등장하였다.[『일사기문(逸史記聞)』] 이에 양원이 도피하자 모친과 부인이 문초를 당하였고, 결국 양원이 수감되면서 모친과 부인은 풀려났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4년 3월 1일, 광해군 4년 3월 2일, 광해군 4년 3월 5일, 광해군 4년 3월 9일] 이후 양원은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사천(泗川)으로 귀양지가 옮겨졌으며, 이듬해인 1619년(광해군 11) 유배에서 풀려났다.[『광해군일기』광해군 11년 5월 14일, 『명재유고(明齋遺稿)』 권39 「호조좌랑 양공 묘갈명(戶曹佐郞梁公墓碣銘)」]

인조~효종 시대의 활동

1623년(인조 즉위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양원은 광해군 대에 김직재의 옥에 연루되었던 것이 신원되었다. 이후 그는 이귀(李貴)와 김유(金瑬)의 추천으로 효릉(孝陵)참봉(參奉)이 되었다. 1626년(인조 4) 모친상을 당하였으며, 상을 마친 뒤 익위사(翊衛司) 세마(洗馬)에 보임되었다가 의금부 도사로 옮겼다.[『명재유고』 권39 「호조좌랑 양공 묘갈명」] 1631년(인조 9) 평안병사(平安兵使)유임(柳琳)을 안주(安州)에서 체포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많은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여겼지만 양원은 진(陣)에 혼자 들어가 수습하여 많은 이들의 탄복을 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9년 7월 3일, 『명재유고』 권39 「호조좌랑 양공 묘갈명」] 이후 사재감(司宰監)주부(主簿), 군자감(軍資監) 주부, 상의원(尙衣院) 주부를 거쳐, 1633년(인조 11) 용인현감(龍仁縣監)이 되었다가, 그 뒤 사섬시(司贍寺) 주부와 종부시(宗簿寺) 주부, 그리고 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과 장악원(掌樂院) 주부를 역임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1년 6월 22일, 『명재유고』 권39 「호조좌랑 양공 묘갈명」]

1638년(인조 16) 예안현감(禮安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세금을 거두는 일과 정해진 숫자의 가족 외에 결혼한 딸도 거느리고 부임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16년 3월 8일, 인조 18년 11월 13일, 인조 18년 11월 16일] 그러다가 1644년(인조 22) 전주판관(全州判官)과 익위사 사어(司禦)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명재유고』 권39 「호조좌랑 양공 묘갈명」] 1645년(인조 23) 호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그해 외직으로 나가 의령현감(宜寧縣監)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23년 2월 22일, 인조 23년 9월 3일] 이후 인조가 승하하자 방상(方喪 : 부모상(父母喪)에 준하는 임금의 상)의 절차를 다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 겨울 현감의 지위를 이용하여 착복하였다는 암행어사의 보고에 의하여 파면 당하였다.[『승정원일기』효종 즉위년 12월 28일] 1650년 2월 3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1세였다.

성품과 일화

양원의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양원은 어려서 아버지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효도와 우애는 저절로 따라 왔으며 거기에다 재능과 식견을 보태어 무리에서 뛰어났으면서도 명쾌하고 민첩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의리를 가까이하였다. 그리하여 광해군 대에는 초야에 엎드려 있으면서 일찍이 세상일에 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인조 대에는 강직하게 아첨하지 않았고 관직에 있으면서는 자신을 단속하여 스스로 조심하기를 힘썼다. 벼슬에서 떠나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였고, 자신이 세상을 떠나자 친구들이 원망하는 논의가 없었다.[『명재유고』 권39 「호조좌랑 양공 묘갈명」]

묘소와 후손

그의 묘소는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 야동(冶洞)에 위치해 있으며, 윤증(尹拯)이 작성한 묘갈명(墓碣銘)이 전한다.[『명재유고』 권39 「호조좌랑 양공 묘갈명」]

첫째 부인 신천 강씨(信川康氏)는 병조 참판강욱(康昱)의 딸이었다. 두 번째 부인은 거창 유씨(居昌劉氏)로 사재감 첨정(僉正)유광도(劉光道)의 딸이다. 강씨 소생은 1남 7녀이고, 유씨 소생은 2남 1녀이다. 장남은 양용제(梁用濟)이고, 둘째 아들은 양도제(梁道濟)인데 모두 통덕랑(通德郞)이며, 3남은 양처제(梁處濟)이다. 장녀는 장사랑(將仕郞)박후문(朴後文)에게, 2녀는 선교랑(宣敎郞)권석(權晳)에게, 3녀는 사인(士人)신적(申樀)에게, 4녀는 익위(翊衛)최휘지(崔徽之)에게, 5녀는 사인이지원(李祉遠)에게, 6녀는 홍우엽(洪宇燁)에게 7녀는 조시수(曺始遂)에게 8녀는 정재화(丁載和)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서자는 양신제(梁愼濟)이다.[『명재유고』 권39 「호조좌랑 양공 묘갈명」]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사계전서(沙溪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일사기문(逸史記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