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해(食醢)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1:23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어패류에 쌀로 만든 밥과 소금을 넣고 발효시킨 것의 통칭.

개설

조선시대에 왕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널리 즐겨 먹던 고급 음식이다. 어패류에 쌀로 만든 밥과 소금을 혼합하여 발효시킨 일종의 보존식품이다. 식해(食醢)·어자(魚鮓)·자(鮓)라고도 불렀다.

만드는 법

숭어 크기만 한 생선의 비늘을 벗기고 아가미를 떼어낸다. 아가미 쪽에서부터 꽂이를 배 쪽으로 밀어 내장을 제거한 다음 깨끗이 씻는다. 생선 뱃속에 소금을 채워 넣고 항아리에 소금을 켜켜로 뿌려 가면서 담아 누름돌로 눌러 놓는다. 뚜껑을 닫아 놓는다. 한 달 정도 지난 후 항아리에 담긴 절인 생선을 꺼내 소금을 제거하고 물기를 뺀다. 되게 지은 소금 간한 쌀밥이나 찹쌀밥을 준비한다. 항아리 밑에 밥을 한 켜 깔고 그 위에 절인 생선을 한 켜 까는 형태로 반복하여 담아 돌로 눌러서 소금물을 붓고 뚜껑을 덮어 밀봉하여 발효시킨다. 5~6개월 후에 꺼내 먹을 수 있다.

천어(川魚)의 배를 갈라 깨끗이 씻고 소금을 뿌려 재운다. 6시간 지난 후에 다시 씻어서 소금을 뿌려 6시간 동안 절인다. 이것을 베자루에 담아 판자 사이에 끼워 돌로 눌러 물기를 뺀다. 멥쌀밥에 소금과 밀가루를 함께 섞는다. 항아리 밑바닥에 밀가루와 소금 섞은 밥을 한 켜 깔고 그 위에 물기 뺀 생선을 한 켜 까는 형태로 반복하여 담아 돌로 눌러 놓는다. 여기에 소금물을 부어서 채워 발효시킨다.

곱게 쓿은 배아가 없는 쌀로 밥을 지어 펴서 차게 식힌다. 조갯살, 식초로 씻어 끈적거리는 기를 없앤 뒤 얇게 편으로 썬 생전복, 엿기름물, 소금, 통천초를 식힌 밥과 합하여 버무려 항아리에 담는다. 아가리를 단단히 봉하고 담요로 항아리를 싸서 따뜻한 곳에 하룻밤 놓아둔다. 저녁에 담그면 다음 날 아침 먹을 수 있다.

연원 및 용도

식해는 쌀밥의 유산균 발효와 소금에 의하여 저장 보존되는 식품이다. 식해의 주재료가 쌀밥, 생선 그리고 소금이란 점에서 볼 때, 식해는 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특히 호수나 하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논농사[水田]에서는 담수어업이 발전하였다.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경상남도 울산시 무거동 옥현유적에서 50동 이상의 주거와 함께 소규모의 수전유구(水田遺構)·용수로(用水路)·휴반(畦畔: 논두둑과 도랑)이 확인되고, 기원전 700~기원전 600년경으로 보이는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 유적 수혈식(竪穴式) 주거 안에서 논농사로 생산된 400g 정도의 쟈포니카(Japonica)형 탄화미와 반달형 돌칼 등이 출토되는 것에서 대체로 마한사회에서 수전도작(水田稻作)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미 담수에서 잡은 생선과 재배한 쌀로 식해를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 대형의 수전도작을 시작한 때는 33년(백제 다루왕 6)이다. 일본에 쟈포니카형의 수전도작과 함께 식해 만드는 법을 전해준 집단은 서쪽에 근거지를 둔 사람들로서 죠몬[繩文] 말기이다. 이 사람들에 의하여 새로운 야요이[彌生]문화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야요이 문화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백제인들은 식해를 만들어 먹었다.

조선시대에 식해는 고급음식이었다. 1429년(세종 11) 4월 7일 중국 조정에 보내는 입조화자(入朝火者)와 처녀택송 그리고 식해청구 문제 등으로 명나라 사신이 왔다. 입조화자란 조선에서 보낸 12세부터 18세 정도까지의 환관 후보자가 명나라 조정에 참여하는 일을 말한다. 조선 조정에서 지극 정성으로 모신 이 귀한 손님들은 직접 현장에 가서 사사로이 식해를 챙겨 가지고 갈 욕심을 낼 정도로 조선의 식해에 탐을 냈다. 그 이유는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 석 달 반을 머물고 7월 19일 북경으로 떠날 때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수조기식해[黃魚鮓] 6통, 잉어식해[鯉魚鮓] 1통, 가리맛식해[土花鮓] 9병을 황제에게 선물로 보냈다(『세종실록』 11년 7월 19일).

궁중에서 귀한 식품으로 대접받았던 식해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귀한 식품으로 각광받았다. 명종 때의 유학자였던 유희춘(柳希春)이 쓴 『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에는 상주식해, 강원도식해, 강원도의 생복식해, 전라남도 무안의 숭어식해, 서울식해가 기술되어 있다. 식해 제조는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문헌으로 『쇄미록(瑣尾錄)』과 『승평지(昇平志)』 등이 있는데 여기에도 부여의 임천식해, 익산의 뱅어[白魚]식해, 순천의 은구어식해·생복식해가 나온다.

식해는 1700년대 말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는 고춧가루 보급과 관련이 있다.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향토음식화된 일부 식해를 제외하고 거의 소멸되었다. 식해 제조에 사용하는 생선은 민물생선에서 점차 바다에서 나오는 수조기·숭어·뱅어·은구어·멸치·갈치·생전복·가리맛 등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식해를 즐겨 먹었으나, 점차 만들지 않게 되면서 1923년경에는 거의 사라졌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식해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음식으로 인식되어 종묘 제례·사직단 제례 등에 어해(魚醢)라는 명칭으로 제물로 올렸다. 일반 백성들의 제례에서는 식해라는 명칭으로 제물로 올렸다.

참고문헌

  • 『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
  • 『쇄미록(瑣尾錄)』
  • 『수운잡방(需雲雜方)』
  • 『승평지(昇平志)』
  •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 『주찬(酒饌)』
  • 김상보,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 광문각, 1997.
  • 김상보, 「식생활」, 『한성백제사』,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8.
  • 김상보, 「충남의 젓갈과 식해문화」, 『충남의 민속문화』, 국립민속박물관,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