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書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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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책을 팔던 점포.

개설

책을 파는 점포는 조선시대에는 서사(書肆)·책사(冊肆), 대한제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는 서포(書鋪), 책포(冊鋪), 서점(書店)이라 불렸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서점이라는 용어는 해방 이후 통용되었다. 책을 팔고 산다는 것은 책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학문의 발달과 지식에 대한 욕구, 그리고 경제의 원활한 유통이 한꺼번에 이루어져야 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경제적 유통구조하에서 서사가 제대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내용 및 특징

서사의 등장 배경에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책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책에 대한 열망은 고려시대부터 유명하여 송(宋)의 구양수(歐陽修)는 고려로 서적이 흘러나가는 것을 금지하도록 특별히 황제에게 간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외적인 구도에 의해 중국의 서적 하사는 계속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황제의 하사품과 더불어 사신의 일행으로 중국에 간 관리들이 구입한 서적들이 국내로 꾸준히 반입되었다.

이렇게 구입한 서적을 바탕으로 개인 장서가들이 등장했다. 유희춘(柳希春), 허균(許筠), 이의현(李宜顯) 등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장서가로서, 그들의 장서는 대부분 사행(使行)으로 중국에 가서 직접 사온 서적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연행(燕行)에 참여하지 못한 관리나 일반인들이 서적을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다.

비록 교서관(校書館)에서 책을 찍어 팔기도 하고 서원이나 문중에서 책을 인출(印出)하기도 했지만 이런 서적은 수요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내용도 경서나 문집이 대부분이었고 인출량도 적었다. 이런 배경에서 사행으로 간 역관들이 중국의 유리창(琉璃廠)에서 사들인 책들과 방각본(坊刻本)으로 찍어낸 책들이 서사를 통해 판매되었다.

서사가 설립되기 이전에는 주로 필사본 형태로 세책점(貰冊店)에서 대여되었고, 방각본 책들이 책쾌(冊儈)들에 의해 팔렸다. 서사가 설립된 이후에는 싼 가격으로 유통할 목적으로 찍어낸 방각본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특히 과거용 교재, 역사책, 시집, 한글소설 등이 잘 팔렸으며, 간혹 불온서가 끼어들어 공급자와 판매자 모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변천

서사 설립에 대한 논의는 조선중기에 시작되었다. 1519년(중종 14) 6월 8일 시강관(侍講官)한충(韓忠)은 향약의 시행과 소학(小學)의 학문적 우수성 등을 논하는 어전회의에서 서사의 설립을 처음으로 건의하였고(『중종실록』 14년 6월 8일), 1522년(중종 17)에는 장령어득강(魚得江) 등이 서사 설립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왕은 책을 구입할 경우 대금을 보조하는 방안을 의논하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하였다(『중종실록』 17년 3월 4일).

이어 1538년(중종 33)에는 왕이 구체적으로 서책의 대금을 말하였다. 즉 서책의 대금을 관상감(觀象監)에서 책력(冊曆)을 인쇄하는 규정에 따라 종이·미곡·면포로 받아서, 종이로는 서책을 인쇄하고 미곡이나 면포는 종이로 바꾸어 인쇄하면 매우 편이할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1542년(중종 37)에도 어득강이 상소를 올려 서사 설치를 주장하면서, 서사에서 간행해야 할 책으로 효·충·열 인물 관련 책,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역사책 등을 거론하였고, 과장(科場)에 불법으로 들여간 책들을 수거하여 서사에 내다팔도록 의견을 제시하였다(『중종실록』 37년 7월 27일). 이렇게 설립에서부터 대금 마련, 인쇄할 책 등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지만 중종대에는 서사가 설립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서관이 활자 주조와 서적 인쇄를 담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관영(官營) 서사를 마련하여 서적을 판매하고자 했던 의도를 통해 조선 정부의 숭문(崇文) 사상을 엿볼 수 있는 한편, 서적의 인쇄와 유통을 정부 차원에서 통제하고자 했던 일련의 계획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서사의 설립 논의가 일어난 시점이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하여 성리학을 진흥시킨 시기라는 면에서 사림파의 독서 경향이 서사의 등장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관영 서사는 설립되지 않았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서사는 사회의 필요에 따라 곳곳에 생겨났다. 서사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먼저 1551년(명종 6) 명종이 대신들에게 서사 설립을 의논하게 하고, 사헌부의 청에 따라 설립을 허락하였다는 실록의 기록과 『고사촬요(攷事撮要)』의 서책시준(書冊市準)에 서적의 가격 목록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때 서사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 ‘서적방사변증설(書籍坊肆辨證說)’에 근거하여 1829년(순조 29)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1551년 설은 확실치 않고 1829년 설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확실한 것은 문예부흥기인 영·정조 시기에 이르러서는 학문 수준이 이전과는 다르게 크게 발달하고, 지식인들이 갈수록 많은 서적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다독(多讀)의 경향으로 인해 독서가, 장서가들이 늘어났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박지원(朴趾源), 정약용(丁若鏞), 서유구(徐有榘), 홍석주(洪奭周), 유만주(兪晩柱) 등이다. 아울러 한글 소설이 등장하여 독자층이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맹아로 표현될 만큼 경제가 활성화되었던 점은 책을 사고 판다는 인식이 조금 더 일상적으로 백성들에게 다가갔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회 변화에 힘입어 이 시기에는 소규모의 서사들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이름이 알려진 서사는 약계책사(藥契冊肆)와 박도량서사(朴道亮書肆)였다. 약계책사는 1752년(영조 28) 『정감록(鄭鑑錄)』 계열의 불온서적을 유통시킨다고 지명되었던 곳이다. 의원인 박섬과 전직 녹사(綠事)였던 이인석이 경영했던 서사로, 한 건물에 의원을 설치하여 약을 파는 한편 책도 팔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약계책사는 중인 계급이 운영하는 다기능 점포였음을 알 수 있다.

박도량서사는 책쾌로 유명했던 조신선(曺神仙)이 드나든 서사였다. 조신선은 조생(曺生), 조삼응(曺三應)으로 불리며 영·정조 시대에 책쾌로 유명하였다. 조희룡(趙熙龍), 정약용 등 당대의 학자들이 그를 친숙히 여겼고, 장서가였던 유만주도 그에게서 책을 구입하였다. 박도량서사는 1771년(영조 47) 불온서인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유통시켰다는 죄목으로 타격을 받았지만, 조신선은 사태를 미리 짐작하고 잠적하여 무사하였다고 한다.

약계책사와 박도량서사를 통해 조선후기 서사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중인 계급이 서사 운영에 참여하였다는 점, 책뿐만 아니라 약재 같은 다른 품목도 함께 취급하였다는 점, 책쾌가 책을 공급하는 중간 상인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 경서·소설 외에 정부에서 금지하는 불온서도 유통되었다는 점 등을 통해 그 당시 서사의 특성을 추출해낼 수 있다.

의의

서사는 책의 유통과 보급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여 조선후기 지식의 다양화와 일반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이민희, 『16~19세기 서적 중개상과 소설·서적 유통관계 연구』, 역락, 2007.
  • 이중연, 『고서점의 문화사』, 혜안, 2007.
  • 강명관, 「조선후기 서적 수입·유통과 장서가의 출현」, 『민족문학사연구』9, 1996.
  • 김치우, 「우리나라에 있어서 서사의 기원에 관한 연구」, 『도서관』28, 1978.
  • 우정임, 「16세기 전반기 서사의 설치논의와 그 의미」, 『역사와 경계』54, 2005.
  • 정형우, 「서사문제논고」, 『조선조 서적문화 연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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