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협(過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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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의 고개를 말하는데, 산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갈 때 지름길로 활용되는 곳.

개설

과협은 산 능선이 뻗어 내려오면서 엎드렸다가 일어서는 기복(起伏)을 반복할 때, 그 엎드린 부분[伏]에 해당된다. 대개 사람들이 고갯길로 많이 활용하기 때문에 자칫 지맥의 손상을 우려하여 조선왕조에서 왕릉이나 궁궐 뒤 과협처에 출입을 통제하여 문제가 되기고 하고, 더러는 보토를 하거나 혹은 엷은 돌을 깔기도 한다.

내용 및 특징

『감룡경(撼龍經)』에는 이종단처(離蹤斷處), 봉요과처(蜂腰過處), 질단과처(跌斷過處) 등이 과협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였다. 과협의 모양을 흔히 봉요와 학슬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봉요는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가 짧은 것을 말하고 학슬은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가 비교적 긴 것을 표현한다. 또한 과협이 참되려면 과협에 바람이 불어 닥쳐서는 안 되고, 과협 부분이 곧고, 뻣뻣하고, 굵고, 길어서도 안 되며, 과협의 양쪽으로 보내주는 산[送山]과 맞이하는 산[迎山]이 있어서 과협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이렇듯 과협은 혈이 형성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본다. 『지리정종(地理正宗)』에서 과협은 두 산 사이에 끼여 있는 고개를 말하는데, 바로 맥이 이 과협의 가운데를 지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과협을 살피는 것을 매우 중시하는 까닭은 과협에서 용의 참된 뜻이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인자수지(人子須知)』에서는 아름다운 과협 없이 참된 용이 있을 수도 없고, 혈도 맺힐 수 없으며, 과협의 아름답고 추함을 알면 용맥의 길흉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과협의 기능은 조산에서 용을 따라 흘러오는 기가 한번 잔뜩 움츠렸다가 더욱더 힘차게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마치 고무호스를 움켜쥐면 물이 더욱 세게 뿜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과협이 없으면 혈이 맺히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협의 종류는 풍수서나 풍수학인마다 그 분류법이 다양하여 20여 종에서 50여 종, 심지어 72종류의 과협까지 분류하는 풍수서도 있으나 실제로 그 모두를 땅에서 찾아보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음(陰)과 양(陽), 곡(曲)과 직(直), 장(長)과 단(短), 정(正)과 사(斜), 대(大)와 소(小) 등 이분적 분류법이 많이 사용된다. 『조선왕조실록』에 과협의 다른 표현으로 음성협과 양성협이 언급되는 것은 바로 음협(陰峽)과 양협(陽峽)의 다른 표현이다.

과협은 생기가 흐르고 혈이 맺히는 결정적 증거로 여겨져 보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과협은 사람들이 넘나드는 고개로 활용되기 때문에 자칫 과협이 손상될 수 있다. 즉 단맥(斷脈)에 대한 우려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곳이 과협처이다. 북악산과 보현봉 사이의 보토현(補土峴) 역시 과협처로서 흙을 보충하여 과협을 보호하려는 흔적이다.

조선에서 과협의 보호를 위해 가장 많이 주의를 기울였던 곳이 바로 헌릉(獻陵)의 과협처로써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달래내고개[穿川峴]이다. 1430년(세종 12) 풍수학인 최양선(崔揚善)이 올린 한 장의 상소로 이후 30년 동안 헌릉에 대한 풍수 논쟁이 전개된다. 최양선은 여러 풍수 고전을 근거로 하여 태종이 묻혀 있는 헌릉의 내룡(來龍) 즉, 주산(主山)에 혈장에 이르는 산 능선이 고갯길로 끊겨서 후손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왕릉 뒤로 나 있는 고갯길을 막아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다른 풍수학인 고중안(高仲安)은 그 고갯길은 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흐름을 보여주는 봉요(蜂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반박하기도 하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세종실록』 12년 7월 7일)(『세종실록』 12년 8월 21일). 그러자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이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하도록 지시하여 3년 뒤인 1433년(세종 15) 그 결과물을 보고하게 할 정도였다(『세종실록』 15년 7월 22일). 그러나 이 보고서로도 제대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여 헌릉 과협처인 천천현에 대해 사람과 우마의 통행을 통제하였다가 허가하였다가를 반복하여 민원을 산다. 과협처 단맥 논쟁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1464년(세조 10) 이순지(李純之)에 의해 마무리된다. 이순지는 과협처의 손상을 막기 위해 전돌[磚石]을 깔자는 절충안을 제시한다(『세조실록』 10년 4월 22일). 결국 박석(薄石)을 깔아 과협처 논쟁은 절충안으로 마무리 된 셈이다.

참고문헌

  • 『지리정종(地理正宗)』
  • 『감룡경(撼龍經)』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村山智順 저·최길성 역, 『조선의 풍수』, 민음사, 1990.
  • 徐善繼·徐善述, 『地理人子須知』, 臺灣, 竹林書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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