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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의 대표적인 원당이었던 개성의 절.

개설

고려시대 왕실의 대표적 원당이었던 흥국사(興國寺)는 승려들이 공식적으로 수계를 받는 관단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팔관재, 기우제, 화엄경도량 등이 설행되었던 사찰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던 시기에 흥국사 불상에서 여러 차례 땀이 흘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후 개경의 쇠락과 더불어 흥국사도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개성 흥국사는 고려 왕실의 대표적 원당(願堂) 가운데 하나였다. 흥국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해동고승전』에서는 고구려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으로부터 온 순도(順道)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고 그가 머물 수 있도록 375년(고구려 소수림왕 5)에 초문사(肖門寺)를 지어주었는데 이 사찰이 바로 흥국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연(一然)은 『삼국유사』「흥법편」에서 "당시 고구려 수도가 압록강 북쪽에 있던 안시성(安市城)이기 때문에 개성의 흥국사를 초문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고, 「왕력편」에서 "고려 태조가 924년(고려 태조 7)에 흥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2) 고려시대

흥국사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승려에게 구족계(具足戒)를 주는 관단(官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초 적연국사(寂然國師)영준(英俊)이 946년(고려 정종 1)에 흥국사의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각종 제례가 행해지기도 했던 것 같다. 흥국사에서 팔관재(八關齋), 기우제(祈雨祭), 화엄경도량(華嚴經道場) 등을 개설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흥국사는 궁궐과 가까웠기 때문에 왕과 신하들이 자주 찾았으며 여러 정치적 사건들이 벌이진 곳이기도 했다. 1198년(고려 신종 즉위) 5월에는 사동(私僮) 만적(萬積) 등이 흥국사에 모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가 실패하였고, 1299년(고려 충렬왕 25)에는 임금이 흥국사에서 죄인들을 국문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1389년 11월(고려 창왕 1)에는 정몽주, 정도전 등이 흥국사에 모여 창왕(昌王)의 폐위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3) 조선시대

조선이 건국된 이후 흥국사와 관련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불상에서 땀을 흘렸다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이는 태조대에 2회, 정종대에 4회, 태종대에 2회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1394년(태조 3) 11월, 1399년(정종 1) 10월의 3회, 1400년(정종 2) 1월, 1403년(태종 3) 12월, 1404년(태종 4) 7월의 기록에서는 "흥국사 불상에서 땀이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1395년(태조 4)과 7월과 1409년(태종 9) 10월의 기사에서는 "유후사(留後司)의 흥국사 불상에서 땀이 흘렀다."고 하였다. 유후사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개성을 통치하던 지방 행정 관청이었다. 그러므로 흥국사 불상에서 땀이 흐른 것은 한양 천도와 관련한 여러 사건들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건국 이후 1394년(태조 3) 10월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1399년(정종 1) 3월에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405년(태종 5) 10월에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수도를 한양으로 확정한 이후 더 이상 『조선왕조실록』에서 흥국사 불상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흥국사는 조선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이후 퇴락하기 시작하여 조선전기에 이미 폐사되었던 것 같다. 조선전기의 문신 남효온(南孝溫)은 개성을 유람하고 쓴 「송경록(松京錄)」에서 ‘흥국사 옛터[興國寺故墟]’라고 표현하였으므로 이때는 이미 폐사되었을 것이다. 흥국사에는 고려전기 강감찬(姜邯瓚)이 조성한 석탑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1748년(영조 24)에 흥국사 터에 있는 석탑의 탑신에 "보살계 제자인 평장사강감찬이 나라가 영원히 태평하고 주변국도 안정되기를 기원하며 공경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히 공양에 충당한다. 1021년(고려 현종 12) 5월 어느 날[菩薩戒子弟 平章事姜邯瓚 奉爲邦家永泰 遐邇常安 敬造此塔 永充供養 時天禧五年五月日也]"이라는 38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영조대 예조 판서민종현(閔鍾顯)이 1796년(영조 20) 7월에 왕에게 보고하기를, 개성 흥국사의 옛터에 있는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는데 강감찬이 쓴 것이라고 하였다(『정조실록』 20년 7월 21일). 현재 그 탑은 개성역사박물관 앞뜰에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 『삼국유사(三國遺事)』
  • 『해동역사(海東繹史)』
  • 『추강집(秋江集)』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형우, 「고려시대 국가적 불교행사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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