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학(宗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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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종친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립 학교.

개설

종학은 예조 속아문인 정4품 아문이다. 조선시대 종학은 1428년(세종 10) 7월 종친의 교육을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밖에 위치하였다. 처음에는 교수관(敎授官)을 두었다가 이를 박사(博士)로 개정하였고, 1466년(세조 12)에는 정4품 도선(導善), 종5품 전훈(典訓), 정6품 사회(司誨)의 직제로 정비되어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종학에서는 오경(五經) 위주로 교육하고 이를 고강(考講)하였다. 그러나 종학의 운영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제대로 되지 않았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는 거의 유명무실화되었으며, 영조대 간행된 『속대전』에서는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종학의 설치는 1427년(세종 9) 9월 예조(禮曹)에서 보고한 내용이 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예조에서는 중국 역대 왕조에서 시행한 종친 교육과 관련된 제도를 설명한 뒤 조선의 경우 성균관(成均館)과 주·부·군·현에 학교를 설치하여 교육을 하고 있으나 종친이 입학할 곳이 없어 교양할 방법이 없으니 건춘문 밖에 학사를 세워 8세 이상 종친을 교육하자고 건의하였다[『세종실록』 9년 9월 4일]. 이 같은 예조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1428년(세종 10) 7월에 종학이 예조 속아문으로 설치되었다[『세종실록』 10년 7월 12일]. 이어 1429년(세종 11) 10월에 예조의 건의대로 경복궁 건춘문 밖에 종학의 독립 건물이 건립되었다[『세종실록』 11년 9월 8일].

조직 및 역할

종학 설치 이후 교육을 담당할 관원으로 교수관을 두었는데, 종3품, 종4품, 종5품, 종6품 각각 1자리씩을 설치하였지만 모든 자리를 채우지 못하고 2명만 임명하였다[『세종실록』 11년 2월 3일]. 1430년(세종 12) 3월에는 교수관을 박사로 개정하고 성균관 관원인 사성(司成), 직강(直講), 주부(注簿) 등이 겸임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2년 3월 6일]. 이후 몇 차례 더 종학의 관원이 증가되는 등으로 변천된 후 세조 연간에 큰 폭으로 개변되면서 위상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착되었다. 즉, 1466년(세조 12) 1월 관제 개편 당시 성균관 관원이 겸하던 겸박사(兼博士)를 폐지하고, 대신 정4품의 도선 1명과 종5품의 전훈 1명, 정6품의 사회 2명을 두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이 같은 직제는 이후 『경국대전』에 그대로 계승되어 수록되었는데, 다만 이전 시기와 같이 성균관의 사성 이하 전적(典籍) 이상의 관원이 겸임하도록 규정되었다.

종학 설치 이후 1430년 1월에는 종친입학의(宗親入學儀)가 제정되었고[『세종실록』 12년 1월 6일], 같은 해 3월에는 종학식(宗學式)이 제정되었다[『세종실록』 12년 3월 7일]. 종학식은 강(講)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면 각자 읽은 글을 돌려가며 청강(聽講)하게 한다든지, 읽는 글을 날마다 기록해 두되 그 통하고 통하지 못한 것도 기록하여 10일마다 보고하도록 한다는 등 종학의 운영 및 고사(考査) 등에 대한 규정 이외에도 종친의 출석 관리나 행동에 대한 규제 내용까지 담고 있다. 이렇게 종학에 대한 제도적 정비가 진행되면서 세종은 종친의 교육에 대한 의지와 그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해 진평대군(晉平大君)이유(李瑈),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 등 대군을 먼저 종학에 나아가도록 하였다.

종친들은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나와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파하도록 하였고, 오경을 학습하며 수업 내용 중에서 추첨하여 고강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2년 8월 25일]. 그리고 종친으로서 금령(禁令)을 5번 범한 자와 강독(講讀)에 3번 불통한 자 등은 벌을 주도록 하였다. 실제로 1434년(세종 16) 1월에는 온녕군(溫寧君)이정(李裎)이 겨울 3개월 동안 종학에 나오지 않은 일자가 가장 많다고 하여 구사(丘史: 왕이 종친이나 공신에게 내려 주던 관노비)를 다시 거두도록 하는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6년 1월 2일). 이런 대책에도 종학에 나아가는 종친들에 대한 교육적 효과가 드러나지 않자 1439년(세종 21)에는 월말마다 종부시에서 종친들이 책을 읽은 일자 및 통(通)·불통(不通), 숙독(熟讀)한 기한 뒤에 폐업한 일수를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1년 4월 14일].

종친들은 국왕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초직으로 종친부 무품[대군왕자, 군왕자]~정6품 감(監)의 관직에 제수되었고, 이후 관계와 관직이 있는 종친은 동반·서반과 같이 고과(考課)·승직(陞職) 등에 의해 가자되고 승직되었다. 이 중 종학에 입학한 종친은 학문 성취, 강경시, 무예시 등을 통해 1계를 가자(加資)대가(代加) 받았다(『세조실록』 1년 8월 9일)[『세조실록』 2년 2월 1번째기사][『세조실록』 8년 3월 1일].

변천

종학에 대한 지속적 제도 정비와 관리 강화 등의 조치가 수시로 이루어졌음에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종학은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았던 듯하다. 이에 1478년(성종 9) 3월 헌납김괴(金塊)는 1품의 종친도 종학에 나아가 공부하도록 하고, 이를 종부시에서 검찰하게 할 것을 건의한 바 있다[『성종실록』 9년 3월 19일]. 또한 1492년(성종 23)에는 「권장절목(勸獎節目)」의 제정까지 논의되었다.

연산군대에는 종친들이 문사(文士)들과 교제하면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기 좋아한다고 하여 종학을 혁파하였다가(『연산군일기』 11년 11월 15일), 1511년(중종 6)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러나 점차 종학 운영이 해이해졌으며[『명종실록』 21년 6월 8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는 거의 폐지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이를 다시 복구하자는 주장이 몇 차례 제기되는 하였으나 설치되지 못하였고, 1655년(효종 6) 7월 우참찬정유성(鄭維城)은 종학을 새롭게 설치하기는 어려운 난점이 있으니 생원이나 진사 중 학문이 뛰어난 자를 종부시 관원으로 삼아 종친 교육을 담당하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효종실록』 6년 7월 14일]. 결국 영조대 편찬된 『속대전』에서 종학은 혁파된 관청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김성준, 「종학에 대하여」, 『향토서울』26, 1966.
  • 한충희, 「조선 세조~성종대의 가자남발에 대하여」, 『(계명대)한국학논집』12,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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