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승당(聚勝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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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년(성종 25) 의주목사구겸(具謙)이 평안도 의주부 성 안 객관 동쪽에 세운 누정(樓亭).

개설

의주목사구겸이 1494년 처음 세웠으며 2년 뒤 신임 목사황형이 다시 이곳을 정비하였고, 명나라 사신의 접반사로 의주에 왔던 노공필이 정자의 이름을 취승(聚勝)이라고 명명하였다. 일명 취승정(聚勝亭)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 온 선조가 이곳에 머물렀으며, 조선의 사신이 중국으로 건너가기 직전 최종적으로 사대문서와 방물 등을 점검하는 곳으로 활용되었다. 1741년(영조 17)에는 영조가 직접 현판을 걸었고, 1798년(정조 22)에는 이전의 규모 그대로 다시 중건(重建)하였다.

위치 및 용도

평안도 의주부 객관 동쪽에 있는 누정으로서 의주목사구겸이 1494년에 세웠다. 홍귀달(洪貴達)이 쓴 그 기문(記文)에 의하면, 의주부 객사 동쪽에 땅이 둥그스름하게 솟은 곳이 비어있었는데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덮여있었고 닭 돼지 등이 더럽혀서 이곳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구겸이 의주목사가 되어 이곳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겨 풀과 나무를 제거하고 땅을 평평하게 다듬고서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2년이 지난 후인 1496년 봄에 새로 부임한 목사황형이 의주의 객사는 크지만 답답하고 압록강 가에 있던 통군정(統軍亭)은 트인 곳에 있지만 높아서 항상 오를 수 없음을 한탄하여, 이 정자의 마당을 정돈하고 창호(窓戶)를 만드는 등 나머지 공사를 마쳤다. 이후 조선으로 들어오는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거나, 조선의 사신 일행인 상사(上使), 점마사(點馬使), 질정관(質正官) 등이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취승당에 모여 사대문서를 검사하여 맞추어보고, 중국 황제에게 바칠 조선의 방물을 다시 고쳐 봉하는 등의 최종적인 점검을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의주로 피난 온 선조가 1년여 간 이곳에 머물렀고,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 군의 장수나 사신들도 취승당과 영춘당에 머물면서 선조를 알현하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1741년에 영조가 어필(御筆)로 현판을 써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걸게 하였다. 1798년 정조는 의주목사이기양(李基讓)의 상소를 받아들여 취승당을 중건하게 하되 주춧돌과 칸수 등의 변경 없이 이전의 모습대로 하도록 하였다.

형태

규모는 40칸에 미치지 못하지만 동산이 있고 뒤채에는 여러 제현(諸賢)의 제각(題刻)이 남아있었는데, 예를 들어 한음(漢陰)이덕형(李德馨)의 제영(題詠)도 있었다. 동헌(東軒) 북쪽으로 하여 일섭문(日涉門)으로 들어가는데 안에는 자그마한 정원이 있어 단풍나무와 꽃나무 수십 그루가 섬돌을 둘러싸고 가득히 심어져 있었다. 정원의 동서쪽의 흰 담장 밑에 작은 대(臺)를 쌓았는데, 성 안의 민가들을 그 대 위에서 굽어볼 수 있었다. 영춘당(迎春堂)이 취승당의 왼쪽에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목사황형이 취승당을 완성한 해인 1496년에 명나라의 황제가 사신 태감(太監)김보(金輔), 이진(李珍), 행인(行人) 왕헌신(王獻臣) 등을 보내어 성종의 시호(諡號)와 새 국왕의 고명(誥命)을 내리도록 하였다. 중국 사신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왔을 때 조정에서 노공필(盧公弼), 송질(宋軼) 등이 접반사(接伴使)로서 이들을 압록강 가에서 맞이하였다. 목사황형이 중국 사신과 접반사 일행을 위해 새로 지은 정자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노공필이 이 정자의 이름이 없음을 듣고서, 이 정자는 조선의 지맥과 중국의 산의 기운을 다 이어받아서 쌓여 유람하는 사람들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므로 그 이름을 취승정이라고 지었고 그 말을 적어서 홍귀달이 기문을 적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천기(朝天記)』
  • 『임하필기(林下筆記)』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