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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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초 |
한글표제 | 초 |
한자표제 | 醋 |
동의어 | 초장(醋醬) |
관련어 | 오매(烏梅)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음식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상보 |
재료 | 누룩, 밀, 쌀, 찹쌀, 오매 등 |
계절 | 여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초(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문종실록』 1년 5월 30일 |
3~5%의 초산을 함유한 시고 약간 단맛이 있는 액체 조미료.
개설
누룩과 밀·쌀·찹쌀을 재료로 하여 발효시킨 것과 오매(烏梅) 등 과일을 재료로 하여 발효시킨 것으로 대별된다. 대개의 경우 간장과 섞은 초장의 용도로 밥상에 올랐다.
만드는 법
밀 4되를 유두날 푹 쪄서 떡갈나무잎으로 덮고 파랗게 띄워 말린다. 7월 초하룻날 쌀 1말에 물을 부어서 불리고, 다시 다음 날 새벽에 물 1말을 새로 부어서 덮어 두었다가 물을 따라 버리고 점심 때 이것을 시루에 담아 찐 다음 따뜻하게 식힌다. 항아리에 앞서 만든 밀누룩 1되당 밀 3되를 넣고 그 위에 더운밥을 넣고서는 물 1말을 붓는다. 생인삼(生人蔘) 6~7개, 매실 6~7개를 넣고 잘 싸매 두었다가 7일째에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를 꺾어서 항아리 속을 젓는다.
밀을 3일 동안 물에 담갔다가 건져 말린다. 이것을 시루에 담아 푹 익도록 잘 쪄서 밀누룩 1되를 섞고 그 위에 닥나무잎으로 덮어 둔다. 3~5일에 누렇게 뜨면 누른 옷을 걷어 버리고 햇볕에 말려서 까불어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붓는다. 항아리 몸통을 담요로 싸맨다. 40일이면 익는다.
씨를 발라 버린 오매 1되를 가장 독한 초에 담갔다가 햇볕에 말린 다음 곱게 빻는다. 이것을 물에 타서 초로 만들어 쓴다.
정화수 한 동이에 누룩가루 4되를 눋도록 볶아 합하여 오지항아리에 담아 단단히 봉해 둔다. 신미일(辛未日), 경자일(庚子日), 을미일(乙未日)을 골라 찹쌀 1말을 찐다. 더울 때 누룩가루와 물이 들어 있는 항아리에 찹쌀밥을 넣고 복숭아가지로 저어 두껍게 봉한다. 양지 바른 곳에 놓아두면 초가 된다. 밀 1되를 푹 삶아 뜨거울 때 함께 넣고 또 섬누룩 1되를 주먹크기 정도로 깨뜨려 넣는다. 봉해서 햇볕 있는 데 둔다. 한 달 후 시어지면 약주훗국을 조금 붓고 구운 대추, 감, 곶감, 도라지, 불에 구운 섬누룩가루를 넣는다. 봉해서 양지 바른 곳에 놓고 쓴다. 초가 적어지면 술과 불에 구운 섬누룩을 넣으면 계속 쓸 수 있다.
연원 및 용도
초(醋)는 산패된 술에서 기원한 것으로, 영어 Vinegar도 ‘신 포도주’란 뜻이다. 지금도 세계 몇 곳은 전통적인 술에 대응하는 초가 있다. 포도주 산출 지역은 포도주식초, 맥주가 나오는 지역은 엿기름식초가 그것이다. 기원전 5,000년경 바빌로니아에는 포도주식초가 있었고, 기원전 3,000년경에는 맥주 양조의 부산물을 상업적으로 생산하여 식초를 만들어 팔았다. 중국의 경우 3,000년 전에 나온 것으로 알려진 『주례(周禮)』에 의하면, 초를 맡아 제조하는 사람이 있었다. 530~550년에 산동성(山東省)의 고평현태수(高平縣太守)였던 가사협(賈思勰)이 지은 『제민요술(齊民要術)』 작초법(作醋法)에는 초 20여 종의 만드는 법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만드는 법]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초 만드는 재료는 밀·쌀·찹쌀·누룩·감·곶감·오매·대추·인삼·도라지 등 다양하였다. 크게 곡식으로 만든 초와 과일로 만든 초로 대별된다.
1795년(정조 19)은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가 회갑[甲年]이 되고, 정조의 즉위 20년 등 경사가 겹치는 해였다. 이에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가 잠들어 계신 화성(華城: 현 수원)의 현륭원(顯隆園)으로 행행(行幸)하였는데, 이때 정조와 혜경궁홍씨의 수라상에 간장에 초를 넣은 초장(醋醬)을 잡채·만두·전·어채·육회·편육·어회에 곁들여 올렸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가정에서 맛있는 초 만들기는 좀처럼 하기 어려웠다. 신미일(辛未日)·경자일(庚子日)·을미일(乙未日)은 초 빚는 길일이고, 무자일(戊子日)·갑진일(甲辰日)·정미일(丁未日)은 초 빚기 꺼리는 날이었다. 초를 빚고도 부정 탄 사람과 낯선 사람은 초를 꺼내거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길일과 꺼리는 날 등이 있었던 것은 초는 장(醬) 다음으로 집 안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상 초 맛이 좋아야 초장 맛도 좋기 때문이다. 만일 초맛이 좋지 않으면 수레바퀴에 묻은 흙 한 줌을 초가 담겨 있는 항아리에 넣기도 하고, 변소 근처에 두어 맛이 좋아지게 하였다. 변소 가깝게 두면 맛이 돌아온다는 말이 있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왕가의 제례 때 올리는 술[酒]·초·장(醬)은 별도로 만들었다. 1451년(문종 1) 봉상시(奉常寺)제조(提調)안숭선(安崇善)이 아뢰기를 “무릇 제향(祭享)에 공진(供進)하는 술·초·장은, 청컨대 먼저 맛보고서 바치게 하소서.” 하니, 집현전(集賢殿)에 명하여 옛 제도를 상고하게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였으므로 먼저 맛보지 말도록 명하였다(『문종실록』 1년 5월 30일).
참고문헌
- 『규합총서(閨閤叢書)』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 『제민요술(齊民要術)』
- 『주례(周禮)』
- 김상보,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 수학사, 1995.
- 김상보,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 광문각, 199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