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림창(營林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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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광무 11) 평안도의 압록강, 함경도의 두만강 연안의 삼림을 보호, 관리, 이용하기 위해 설치한 삼림 경영기관.

개설

1907년 4월 16일 칙령 제21호에 따라 영림창제가 반포 시행되었다. 통감부에서는 평안도와 함경도 변경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삼림을 보호, 관리하기 위해 영림창을 설치하였다. 영림창은 연안의 삼림을 관리하면서 벌목, 가공해서 재원을 마련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905년(광무 9) 10월에 임시로 편성된 기관으로 압록강의 삼림 경영을 맡았다. 하지만 1860년 청국이 외국과 맺은 북경조약 때 압록강 좌안의 삼림을 청·일의 합동조직이 맡아 관리하기로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한국 측의 목재창은 필요하지 않았다. 1906년(광무 10) 10월 19일 통감부에서는 한·일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목재를 경영하기로 양국 간에 협동약관을 체결하였다. 이해 11월 16일 통감부에서는 법제국(法制局)으로부터 한국영림창(營林廠) 관제안(官制案)에 대하여 협의를 받았다. 법제국에서는 영림창이 통감의 관리에 속하며,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 삼림경영에 관한 사무를 영위하고, 영림창 사무는 당분간 군용목재창(軍用木材廠)에서 취급하도록 했다. 1907년 1월 25일 한국삼림특별회계법위원회(韓國森林特別會計法委員會)는 「한국삼림특별회계법안(韓國森林特別會計法案)」, 「한국영림창관제(韓國營林廠官制)」, 「동직원관등급여령(同職員官等給與令)」, 「동직원특별임용령(同職員特別任用令)」을 심의 가결하였다. 이 내용은 일본총무대신에게 보고되었다. 한국은 1907년 칙령 제21호로 서북영림창의 관제를 정하고, 일본 정부는 1906년 법률 제24호로 한국삼림특별회계법을 공포하고, 이어서 칙령 제72호로 통감부영림창의 관제를 정하여 5월 13일에 개청하였다. 영림창 설립 당시의 창장(廠長)은 목재창장이 겸임하였기 때문에 편의상 그 본부를 청나라안동현 목재창 구내에 두었다가, 1908년 10월 신의주로 이전하였다.

조직 및 역할

영림창은 탁지부와 농상공부가 관련 조약에 기초하여 공동으로 관리하였으며, 압록강, 두만강 연안 삼림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았다. 창장 1인은 칙임관(勅任官) 혹은 주임관(奏任官)이었다. 사무관(事務官)은 5인이며, 기사(技師)는 수시로 증감하며 주사(主事) 5인은 판임관(判任官)이었다. 사무관은 함경북도관찰사, 평안북도관찰사가 겸임하기도 하였고, 서북영림창(西北營林廠) 사무관이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전보되기도 할 정도로 고위 지방관이었다.

영림창은 갑산군 혜산진에 지청(支廠)을 열고, 삼수군 신갈파진(新乫坡鎭)·자성군(慈城郡) 중강진·강계군 고산진(高山鎭)에 각각 출장소를 만들었다. 회령군 회령 및 부령군 청진에도 출장소를 두었고, 무산군 연암(延岩)에는 파출소를 두어 벌목과 뗏목의 감시 또는 목재공급의 일을 관장케 하였다. 또한 저목(貯木)과 제재를 위해 의주부 북하동(北下洞)·신의주·용천부(龍川府) 용암포(龍巖浦) 등에도 출장소를 두었다.

압록강에서는 1909년까지 30만 척, 두만강 인근은 10만 척을 벌목하였다. 이렇게 벌목한 목재는 구입을 희망하는 자가 일정한 원목료를 내고 사서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었다. 특히 신갈파진과 중강진, 고산진에는 일본인을 이민시켜 이들이 벌목한 목재를 운반하는 뗏목타기를 본업으로 하도록 했다.

변천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영림청관제(營林廠(廳)官制)」가 공포되어 총독부에서 압록강 및 두만강 연안의 삼림 경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통감부에서 관할하던 영림창은 총독부 체제에서는 영림청으로 바뀌어 이어졌다.

참고문헌

  •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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