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공안(辛酉貢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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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년(연산군 7)에 국가 재정의 전반적인 증액을 목표로 개정한 공안.

개설

조선전기 국가의 재정은 공안과 횡간에 따라 운영되었다. 연산군대에는 각릉(各陵)·각전(各殿), 여러 군(君)옹주(翁主)의 수가 늘어나면서 경비도 늘어났다. 그들이 사용할 각종 물품의 지급과 계속되는 왕 자녀의 혼인 및 저택 신축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경비는 횡간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별례(別例)의 용도로 지출된 것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연산군대에 이르러 왕실의 경비 지출이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연산군을 비롯하여 경비를 담당한 호조는 국용(國用)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안(貢案)을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501년(연산군 7) 4월 태평관에 공안상정청을 설치하고, 좌의정성준(成俊) 등에게 그 일을 감독·관장하게 하여 모든 경비와 공안을 상정하였다(『연산군일기』 7년 4월 15일). 수차례에 걸쳐 논의한 결과 마침내 그해 7월에 상정청가행조례(詳定廳可行條例)가 결정되어 공안이 개정되었다(『연산군일기』 7년 7월 17일). 이때 만든 공안을 신유공안이라고 하였다. 신유공안은 공안의 총액을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내용

모든 각사에서 쓰는 여러 물품 중 남는 것이 없이 부족하면 그 양을 헤아려 늘려 정하였다[加定]. 가정할 수 없는 것은 사용처의 긴요 여부를 고려해서 사용처를 정하였다. 또한 각사에서 남은 물품으로 대용(代用)할 수 있으면 대신하고, 대신할 물품이 없으면 다른 각사에서 남는 물품으로 대용하였다.

변천

연산군대 공안 상정을 통해 국가 재정이 대대적으로 늘었지만, 그 후에도 국가 재정은 만성적으로 부족하였다. 이로 인해 “상공(常貢) 외에 가정(加定)·인납(引納)이 없는 해가 없다.”라고 할 지경에 이르렀다. 연산군은 “공상(供上)하는 일에 어찌 민폐를 헤아리겠는가. 성인이 다시 난다 해도 반드시 경상(經常)의 법을 쫓을 수는 없을 것이며, 또 임시로 변통하는 일도 있는 것이니 각 도에 가렴(加歛)하도록 하라. 만약 부족하다면 또 가렴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할 정도로 가렴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8월 15일). 이에 1505년(연산군 11) 9월에는 공물의 양을 이전보다 늘린 가정을 입법화하였으며, 수시로 하는 진상[無時進上]은 법에 규정된 공물 액수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해마다 늘어났다. 연산군대를 거치면서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낭비가 구조화되고, 국가 재정은 항상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가정·인납 등의 형태는 거의 일상화되었다.

참고문헌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김성우, 「16세기 국가재정 수요의 증대와 국역체제의 해체」, 『한국사연구』 97, 1997.
  • 김성우, 「16세기 국가재정의 위기와 신분제의 변화」, 『역사와 현실』 16, 1995.
  • 박도식, 「16세기 국가재정과 공납제 운영」, 『국사관논총』 제80집, 1998.
  •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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