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창(松峴倉)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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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현창 |
한글표제 | 송현창 |
한자표제 | 松峴倉 |
상위어 | 창고(倉庫) |
관련어 | 관창(官倉), 군자감(軍資監), 군자삼감(軍資三監), 용산창(龍山倉) |
분야 | 경제/재정/창·늠·고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전기 |
왕대 | 조선전기 |
집필자 | 최주희 |
폐지 시기 | 성종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현창(松峴倉)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1년 8월 2일, 『태종실록』 11년 9월 15일, 『세조실록』 6년 8월 24일, 『중종실록』 25년 1월 19일 |
조선전기 서울 송현동에 위치한 군자감 창고의 하나.
개설
조선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국고 재원을 비축할 창고의 설치가 시급히 요구되었다. 태조대에는 전 왕조의 유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장(私藏)으로 운영되던 창고를 축소·폐지하였으며, 태종대에는 국고곡을 저장하는 창고의 설치와 운영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예컨대, 묵은 곡식과 햇곡식을 구분하여 관리하고 창고 바닥을 벽돌로 다지게 하는 등 창고곡의 부식을 방지하고 외벽을 쌓아 방화나 도난에 대비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이와 더불어 도성에 유입되는 세곡이 증가함에 따라 도성 안팎에 창고를 증설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1411년(태종 11)에 이미 국고가 가득 찼으니 충청·강원·풍해·경기 지역에 나무를 베어 창고를 짓자는 호조의 요청이 있었으며(『태종실록』 11년 8월 2일), 같은 해 9월에는 서울과 양강(兩江)에 빈 창고가 없어 경상도의 전세를 쌓을 곳이 없게 되자 충주에 300여 칸의 조운창을 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태종실록』 11년 9월 15일). 따라서 송현창은 조선초 도성에 관창을 증설하는 과정에서 설립된 군자감 소속 창고로서 종로구 송현동에 위치해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태종대 도성에는 광흥창과 풍저창, 군자감 창고와 같이 국고곡을 비축하는 대창들이 본창과 분창의 형태로 도성 안팎에 설치되었다. 문무 관료들의 봉급은 광흥창에서 지급하였고, 내관의 급료는 풍저창에서, 그리고 액정서(掖庭署) 소속 궐내외 각 아문의 장교(將校)·이예(吏隸)·공장(工匠) 및 잡직의 급료는 군자감에서 지급하는 형태를 띠었다.
송현창은 군자감의 분창(分倉)으로 서울 송현동에 설립되었다. 1392년(태조 원년) 관제를 새로 정비할 때 군자감을 두었는데 1410년 무렵 군자감에서 창고가 매우 좁다는 이유를 들어 증축을 청하였다. 이후 용산 강변과 송현에 군자감 창고를 증설하여 본감과 분감 체제를 유지하였다.
송현창이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문종대 송현의 좌우 행랑에 군자감의 미곡을 쌓아 두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좌우 행랑고가 바로 송현창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1460년(세조 6)에는 군자감의 직제를 정비하고 창고의 경우도 본감과 송현창(분감), 강감(용산창)의 삼감 체제를 확립하였다. 군자감을 본감과 분감의 형태로 확대 운영한 것은 국고곡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편으로 모색된 것이었다.
조직 및 역할
1460년(세조 6) 당시 호조에서 군자감을 나누어 설치할 것을 아뢰면서, 군자 본감(本監)에 판관(判官) 1명과 직장(直長) 1명을 두고 송현(松峴)의 창고에는 부정(副正) 1명과 직장 1명, 녹사(錄事) 1명을 두도록 하였다. 또 용산강(龍山江) 창고에는 정(正) 1명과 주부(注簿) 1명, 녹사1명을 두어 출납(出納)의 업무를 감수하게 하고, 판사(判事)가 항상 본감에 출근하여 3곳을 총괄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세조실록』 6년 8월 24일).
변천
군자감이 본감과 분감·강감으로 규모가 확대되었음에도 운영상에서는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군자감의 분창이 용산 강변과 송현동에 증설되었으나 부속창고의 칸수가 적어 곡식을 저장하는데 여전히 곤란을 겪었다. 1464년(세조 10) 호조에서는 송현동 좌우의 행랑고에 곡식이 넘치는 데다가 동행랑과 서행랑 인근에 잡인들이 거주하는데도 방화(防火) 담장이 없는 점을 염려하여 거주하는 사람을 쫓아내고 담장을 쌓게 하였다.
1467년(세조 13)에는 수직 군인이 칼에 찔리는 부상을 당하여 사섬시와 관청을 바꿔 쓰기도 하였으나 성종대 다시 10,000석의 미곡을 도난당하는 등 창고 운영에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럼에도 1530년(중종 25) 무렵 군자감의 곡식은 본감에 150,000석, 분감에 280,000석, 강감에 300,000석이 보관된 것으로 집계되어(『중종실록』 25년 1월 19일) 분감에 해당하는 송현창이 당시까지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오정섭, 「高麗末·朝鮮初 各司位田을 통해서 본 중앙재정」, 『한국사론』 27, 서울대학교, 1992.
- 이장우, 「朝鮮初期 軍資田에 대한 일고찰」, 『역사학보』 118, 역사학회, 1988.
- 강제훈, 「朝鮮初期 田稅財政 硏究-國庫穀의 확보와 운용」,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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