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등(分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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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등급을 정하는 것, 혹은 관찰사가 도내의 한 해 농사의 재실 상황을 등급을 나누어 보고하는 것.

개설

분등이란 용어는 ‘등급을 나누다’라는 일반적인 용어로, 전세(田稅)와 관련하여 사용될 때에는 전품(田品)을 판정하여 토지의 등급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절대 면적에 따라 토지를 측량하지 않고, 대신 토지 생산성에 따라 복수의 기준으로 면적을 책정하는 결부법(結負法)을 시행하였다. 결부법에서는 토지의 면적은 달라도 1결로 묶인 단위 토지의 생산량과 수취량은 동일하였다. 따라서 해당 토지가 어느 등급의 생산성을 가지는 토지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수취량의 결정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한편, 18세기 이후 전세 수취는 비총제(比總制)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비총제에서는 국가에서 각 군현 단위로 급재결(給災結)의 수를 내려 주었다(『숙종실록』 42년 8월 8일). 이것은 군현의 전체 토지 결수에서 자연재해에 따른 해당 지역의 피해를 고려하여 지급한 급재결수만큼의 세금을 감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각 군현의 풍흉 정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도의 관찰사는 각 군현의 풍흉 상황을 등급으로 매겨 장계(狀啓)로 보고하였다.

내용 및 특징

전품에 대한 판정은 양전을 할 때 이루어졌다. 세종 이전에는 상·중·하 3등급으로 판정하였으나,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이 도입되고 난 이후에는 6등급으로 세분화되었다(『세종실록』 26년 7월 4일). 공법 시행이 확정된 이후에도 이에 따른 양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기존의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을 참고하여 이를 6등전으로 분등하여 전품을 판정하고 면적의 환산율을 적용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후 세조대에는 공법에 따른 양전이 도 단위로 이루어졌다. 이로써 마침내 16세기 초반에 이르러 전국의 토지는 공법에서 정한 전품의 등급에 따라 나뉘어졌다.

조선조의 국가 재정은 농업 생산물에 부과되는 부세(賦稅)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업 생산량은 해당 연도의 기후 여건, 해당 토지의 토질·입지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정부는 이처럼 다양하고 가변적인 상황을 탄력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분등은 이러한 변수들에 대해 정부의 대응을 법제화한 것이었다. 이는 농민에 대한 일방적인 수탈이 아니라 이들의 재생산을 보장할 수 있는 세제(稅制) 하에 국가 재정을 운영하려는 당국자들의 고민이 반영된 결과였다.

변천

전품의 등급을 나누는 일은 조선조 내내 시행되었으나, 18세기에 이르면 각 군현의 결수를 일일이 파악하지 않고, 대신 전세 총액만을 부과하는 비총제가 시행되었다. 군현별 전세 총액을 정하기 위해서는 매해 해당 지역의 풍흉 정도를 가늠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중앙정부에서는 세를 감해 주는 급재결의 수를 내려 주었다. 이러한 급재결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 도의 관찰사에게는 재실분등장계(災實分等狀啓)를 올리게 하였다(『영조실록』 43년 10월 10일). 재실분등장계는 도내 군현의 재실 풍흉 정도를 등급을 매겨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이러한 분등장계는 1783년(정조 7)부터 법제화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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