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해자(乙亥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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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세조 1) 강희안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금속활자.

개설

을해자(乙亥字)는 강희안(姜希顔)의 글씨를 바탕 글자로 삼고 주성(鑄成)하게 한 것으로, 그 인본(印本)을 조사하여 보면 대자(大字)·중자(中字)·소자(小字)의 3종이 쓰이고 있다. 글자체가 평평하고 대체로 폭이 넓으며, 중자에는 강희안 글씨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한글 활자가 쓰였는데, 이를 ‘을해자병용한글자’로 일컫는다.

을해자의 자본을 쓴 강희안은 당시의 명필가로서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예서와 팔푼(八分)에도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기록상에 전하는 강희안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를 묵화로 즐겨 그렸으며, 영모화(翎毛畵)·산수화·인물화에도 모두 뛰어났다. 을해자를 처음으로 고증한 학산(鶴山)이인영(李仁榮)은 『응제시주』에 수록된 서문·발문이 강희안의 글씨임을 확인하고 비교 실사하여 을해자를 확정한 바 있다.

내용 및 특징

을해자 주조의 배경이 될 수 있는 기록으로 1474년(성종 5) 11월에 동지사이승소(李承召)가 여러 역사서의 간행을 건의하는 내용 중에 왕이 우부승지김영견(金永堅)에게 책의 간행에 사용하는 활자의 종류를 묻는 내용이 있다(『성종실록』 5년 11월 22일).

김영견은 1434년(세종 16) 갑인년과 1455년(세조 1) 을해년에 주성한 활자를 사용한다고 말한 후, 책의 인쇄에는 경오자(庚午字)가 으뜸인데 안평대군이 바탕 글자를 쓴 것이라 이미 훼손되었으며, 을해자는 강희안에게 명하여 자본을 쓰도록 하여 주성한 것이라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신주자발(新鑄字跋)에도 “을해년(1455)에 주성된 것을 을해자로 칭하고 강희안이 글자본을 서사(書寫)한 것”이라 하면서 “1465년(세조 11) 을유년에 주성된 을유자(乙酉字)와 함께 쓰고 있다”고 하였다.

을해자는 한자(漢字)와 한글자가 있다. 대자·중자·소자의 3가지 활자가 제작되었으며, 함께 사용된 한글자는 1461년(세조 7)에 만들어졌다. 한자의 대자는 세조의 서체를 바탕 글자로 삼았으며, 중자와 소자는 강희안의 글씨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을해자 주조의 정확한 날짜와 완성에 걸린 시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기록이 없으며, 갑인자(甲寅字)와 더불어 선조조까지 약 150년 동안 사용되었다. 선조 초기에는 주조한 지 오래되어 정밀하지 못하고 오자가 많이 생겨서 대폭 보주(補鑄)하기도 하였다.

을해자는 선조조까지 비교적 오래도록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인본도 갑인자본 다음으로 많았으며, 현전본도 비교적 많이 전래되고 있다. 인쇄본 중에서는 각종 불경류와 『고려사』·『훈사』 및 『역대병장설』 등이 비교적 초기 인본에 해당된다.

특히 불경 중에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은 을해자의 대자·중자·소자와 한글자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불경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도 을해자로 인쇄된 것이 있다. 1466년(세조 12) 11월에 대사헌 양성지(梁誠之)가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을 을해자로 인쇄할 것을 건의하였다(『세조실록』 12년 11월 17일). 이후로 세종·문종·세조·예종의 사조(四朝) 실록이 1473년(성종 4) 6월에 을해자로 인출되었으며, 이 일에 종사한 관원에게 상이 내려졌다. 최근에는 을해자의 실물로 을해자병용한글활자의 소자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음이 확인된 바 있다.

변천

을해자는 1455년 강희안의 글씨를 자본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주조의 정확한 날짜와 완성에 걸린 시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기록이 없다. 을해자는 비교적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선조 초기에는 주조한 지 오래되어 정밀하지 못하고 오자가 많이 생겨서 대폭 보주하기도 하였다. 보주 직전인 중종·명종 연간에 간행된 을해자본(乙亥字本)은 활자의 마멸이 심하고 보자(補字)도 많이 나타난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3년(선조 36)까지는 일부분 남아 있던 을해자가 서적의 인쇄에 사용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을해자의 부식이 적지 않자 춘추관에서 목활자의 보충을 통하여 『조선왕조실록』의 인쇄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의의

을해자는 갑인자와 더불어 조선전기의 대표적 금속활자로서 15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쓰였다. 을해자로 인쇄한 서적의 주제는 불경·역사서·군사서·시문·경서 등 매우 다양하다. 을해자는 한글의 보급과 사용, 한국의 인쇄 문화사 연구 등에 필수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활자이며, 실물 활자의 발견으로 그 의미는 더욱 커졌다.

참고문헌

  •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한국문화사대계』6,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9.
  • 『한글금속활자』, 국립중앙박물관, 2006.
  • 김두종, 『한국고인쇄기술사』, 탐구당, 1980.
  • 백린, 『한국도서관사연구』, 한국도서관협회, 1981.
  • 『서물동호회회보』17, 서물동호회, 1942.
  • 천혜봉, 『한국전적인쇄사』, 범우사, 1990.
  • 천혜봉, 『한국 서지학』, 민음사, 1997.
  • 『조선왕실 주조 금속활자 복원사업 결과보고서』, 청주고인쇄박물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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