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迎華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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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기도 수원의 영화역을 중심으로 설치한 역도(驛道).

개설

영서도(迎曙道)·도원도(桃源道)·중림도(重林道)·경안도(慶安道)·평구도(平丘道)와 더불어 경기도에 속해 있던 양재도(良才道)가 1796년(정조 20)에 개편되어 영화도(迎華道)가 되었다. 중심역인 영화역(迎華驛)에는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장하였다. 1896년(고종 33) 1월 18일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역도-속역 체제는 고려의 체제를 계승하여 성립했는데, 1413년(태종 13)에 부분적인 개편을 시행하였다. 이때 경기도의 마산도(馬山道)를 청파도(靑坡道), 금곡도(金谷道)를 중림도(重林道), 풍해도구참(豊海道九站)을 동선보산도(洞仙寶山道)로 개편하고 청교도(靑郊道)를 증설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평구도(平丘道)를 복치하였다. 그 뒤 1423년(세종 5)에는 경상도에 황산도(黃山道)와 성현도(省峴道)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6진 개척을 계기로, 태조 이후 신설한 역을 관리하기 위하여 역도-속역 체계를 확립하였다.

영화도의 전신(前身)인 양재도는 세조 연간에 역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고려시대의 광주도(廣州道)에 속한 역들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즉 1421년(세종 13) 한양에서 전국의 주요 지점으로 연결되는 역로에는 일반 역승 대신 정역찰방(程驛察訪)이 파견되었다. 이때 충청좌도 방면의 양재(良材), 낙생(樂生), 구흥(駒興), 김령(金寧), 좌찬(佐贊), 분행(分行), 무극(無極) 등의 역이 경기좌도충청도정역찰방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1456년(세조 2)에는 경기좌도충청도정역찰방을 경기충청좌도정역찰방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두 정역찰방의 관할하에 있던 경기의 역들을 모두 양재도 관할에 편제하였던 것이다.

이후 정조 연간인 1796년에 영화도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과천역과 영화역을 새롭게 설치하고 청호역(菁好驛)·장족역(長足驛)·동화역(同化驛) 등 3개 역은 혁파하였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양재역을 수원 장안문(長安門) 밖 동쪽 1리 지점으로 옮기면서 영화역으로 개칭하고 양재도를 영화도로 개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홍재전서(弘齋全書)』를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철종대에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영화도 찰방은 총리척후장(摠理斥候將)을 겸하였는데, 이는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일치하며, 영화도는 장안문 밖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영화도에는 낙생(樂生)·구흥(驅興)·금령(金嶺)·좌찬(佐贊)·분행(分行)·무극(無極)·과천읍참(果川邑站)·수원본참(水原本站)·해문(海門)·가천(加川)·강복(康福) 등 11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1865년(고종 9)에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낙생·구흥·금령·좌찬·분행·무극·강복·가천·청호·장족·동화·해문 등 12개 속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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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홍재전서(弘齋全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병로, 『韓國近世 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
  • 정요근, 「조선초기 역로망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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