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2:35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1797년(정조 21)에 이병모(李秉模) 등이 왕명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합하여 편찬한 책.

개설

1434(세종 16)년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와 1518년(중종 13)년에 간행된 『이륜행실도』를 하나로 묶어 편찬한 책이다. 정조가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진찬연(進饌宴)을 현재 경기도 수원의 화성 행궁에서 열고, 이어서 지역 노인들에게 베푼 양로연(養老宴)을 시작으로 백성을 감화시키고 좋은 풍속을 이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조선시대 발간된 행실도류 가운데 가장 늦게 편찬되었으며, 조선후기의 수준 높은 판화 기술을 잘 보여주는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1895년(철종 10)에 한 차례 중간본이 발행되었다.

제작 배경

정조는 세손(世孫) 시절에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으나 할아버지 영조의 도움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규장각을 세우고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을 양성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조는 유교적 사회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효(孝)를 중시하였다. 1795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수원에서 지역 노인들을 초청한 양로연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의전 행사를 거행하면서 모든 행동의 근본이 효에 있음을 표방하였다.

정조는 먼저 불교 경전 가운데 효를 강조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1796년(정조 20)에 간행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는 『소학(小學)』, 『향례합편(鄕禮合編)』,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간행하게 하였다.

정조는 『오륜행실도』 서문에서 세종 때 설순(偰循)이 지은 『삼강행실도』와 중종 때 조신(曺伸)이 편찬한 『이륜행실도』를 합하여 편찬하였고, 이 두 책을 표준으로 삼아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1797년(정조 21) 1월 1일에 편찬 명령이 내려지고, 같은 해 7월 20일에 주자소(鑄字所)에서 완성하여 왕에게 진상되었는데 5권 4책의 많은 분량임에서도 책의 간행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앞서 간행된 행실도가 모두 목판 인쇄를 활용한 것과 달리 이 책의 제작에는 활자를 이용하였는데, 한문은 정조 때 구리로 만든 활자인 정리자(整理字) 활자체를 사용하였고, 한글은 나무로 만든 활자인 목활자(木活字)를 사용하였다. 이는 정조대에 서적 편찬과 직결되는 활자 제작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구성 및 특징

책은 『삼강행실도』의 효자, 충신, 열녀편 3권 3책과 『이륜행실도』의 형제·종족편, 붕우·사생편 2권 1책을 묶어 도합 5권 4책으로 합쳐서 편집하였다.

책머리에는 정조가 1797년 1월 1일에 내린 「어제윤음(御製綸音)」이 실려있고, 이어 이만수(李晩秀)의 「오륜행실도서(五倫行實圖序)」가 실렸다. 이만수의 서문 뒤에는 세종대의 권채(權採)가 쓴 「삼강행실도원서(三綱行實圖原序)」, 윤헌주(尹憲柱)의 「삼강행실도원발(三綱行實圖原跋)」, 강혼(姜渾)의 「이륜행실도원서(二倫行實圖原序)」가 차례대로 수록된 후, 규장각의 이병모, 윤시동(尹蓍東) 등 교열한 사람과 감인(監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

본문에는 모두 150인의 모범 사례들이 수록되었는데, 효자 33인, 충신 35인, 열녀 35인, 형제 24인, 종족 7인, 붕우 11인, 사생 5인 등이다. 수록된 인물의 대부분은 중국인이며, 우리나라 사람은 효자 4인, 충신 7인, 열녀 6인으로 총 17명이다. 이는 중국의 사례를 중요시한 『삼강행실도』의 뜻을 계승하면서 정조가 강조한 유교 이념에 적합한 사례만을 뽑아 수록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의 구성은 앞장에 그림을 넣고 오른쪽 상단에 성명과 국적을 표기하였으며, 뒷장에 한문으로 내용을 기록한 다음 한 칸을 내려 시를 덧붙인 후 한글로 번역하였다. 영조대에 중간된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에는 한글이 앞면 그림의 윗부분에 실려있는 것에 비해 『오륜행실도』에서는 한문으로 사실을 기록한 뒤에 덧붙여졌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150여 점의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구도와 인물 표현, 바위의 준법, 수지법을 보면 당시 유행했던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이 반영되었다. 특히 그림의 구성이 단순화되면서 한 장면만을 부각하여 표현하였다. 이는 이전에 제작된 행실도류에서 다른 시간에 벌어진 2, 3개의 장면을 한 화면에 엮는 복합적인 구성과는 다른 특징이다. 장면 구성은 단순해졌으나 배경, 인물, 주변의 경물 표현 등은 다양하고 섬세해졌으며 새김 기술이 정교하다. 수준 높은 판화 그림의 제작에는 당시 궁궐에서 활동했던 최고의 화원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초간본은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중간본은 1859년(철종 10)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며 김병학(金炳學)이 쓴 서문이 실려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동국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이민수, 「오륜행실도 해제」, 『오륜행실도』, 을유문화사, 197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