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虞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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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를 치르고 난 직후에 위판에 글씨를 쓰고 모시고서 돌아와 혼전에 안치한 신주.

개설

『의례』 사우례의 주(注)를 보면, ‘우(虞)’는 ‘편안하다[安]’는 뜻으로, 우주에 깃든 망자의 혼령을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해 지내는 제사가 우제이다. 우제의 횟수는 『주자가례』에서는 세 번이나, 국왕은 일곱 번으로 칠우제를 지내도록 되어 있다.

우주를 안치할 때에는 뒤에 의궤(倚几)로 바치며, 내궤와 외궤를 만들어서 평상시에 보관해 두는 용도로 사용했다. 궤의 안팎에는 모두 붉은 비단의 좌자(座子)가 있고, 겉은 백초(白綃)로 쌌다. 궤를 올려놓는 대(臺)도 만들어 사용했는데, 재질은 잣나무 판이다. 신주에는 백저(白紵)의 복건(覆巾)을 덮었다. 왕후의 경우에는 청저건을 사용한다.

내용 및 특징

우주는 유교 의례에서 국왕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하는 공통된 절차였다.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고, 정처 없이 떠도는 혼령은 제주함으로써 이 신주에 깃들게 된다고 생각했다. 위판은 향탕(香湯)으로 목욕시키고 수건으로 닦은 후에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그 위에 글씨를 썼다. 국왕의 경우 ‘모호대왕(某號大王)’이라 쓴다고 되어 있는데, ‘모호’는 시호와 존호를 모두 포함했다. 그러고는 우주를 궤에 넣어서 뚜껑을 덮고 영좌에 안치하였다. 혼백함은 그 뒤에 놓았다. 따라서 이때부터 영좌의 주인은 우주가 되며, 모든 전제(奠祭)는 이를 대상으로 하게 된다.

우주는 훙서한 국왕의 첫 번째 기일인 연제(練祭) 때를 맞아 운명을 다하였다. 이때 다시 쓴 신주를 연주라고 한다. 연주에는 묘호(廟號)를 시호 등과 함께 기록하였다[『철종실록』 즉위 10월 24일 2번째기사]. 국왕의 혼령은 우주에서 연주로 옮겨 깃들게 되는 것이다. 우주는 연제가 끝나는 대로 요여(腰輿)에 싣고 종묘로 가서 연주를 봉안할 정전의 실 바로 뒤편에 있는 북계(北階)에 묻었다.

우주의 매안 절차는 1777년(정조 1) 3월에 행해진 사례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그 사유를 사당에 아뢰는 고유를 행했다. 이때에는 영조의 혼전인 효명전에서 설행했다. 그날 정해진 길한 시간에 우주를 매안할 광혈(壙穴)을 팠다. 이튿날 연제를 파한 후에, 혼전의 관원과 내시, 예조 삼당상(三堂上)은 우주를 모신 신여(神輿)와 세장(細仗)을 이끌고 종묘의 바깥 정문을 거쳐서 들어갔다. 도제조와 제조, 종묘서 관원은 먼저 대문 안에 들어가서 공경히 이를 맞이하였다. 우주는 동쪽 정문 밖에 설치한 포장에 임시로 봉안하였다.

해가 뜰 무렵에, 우주를 받든 관원은 정문을 거쳐 들어가 북계 아래의 악차(幄次)에다 봉안하였다. 악차 안에서 우주는 유둔(油芚)으로 싸고 흰 무명으로 묶어서 외궤에 넣고, 백문석으로 싸서 작은 끈으로 묶었다. 그러면 이를 별감 4명이 흰 무명으로 받들어서 구덩이에 내리는데, 남쪽을 향해 세워서 묻었다. 우주를 기대어 놓는 의자 역시 백문석으로 싸고 가는 끈으로 묶어 궤 북쪽에 놓고서 흙을 쌓고 모래로 덮었다. 우주를 매안할 때 간혹 전 시기 국왕이나 왕비의 시책 등을 얻기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 숙종의 3비 인원왕후의 우주를 매안 시 인조비 인렬왕후 한씨의 시책을 얻었다.

의의

상장례는 신주에 혼령을 깃들게 하고 묘소에 체백을 묻는 이원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혼령이 편안히 안식을 갖도록 깃들어 있는 신성한 물건이 곧 우주이므로 당시의 윤리관과 사회관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정종국장도감의궤(正宗國葬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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