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산병풍(五峰山屛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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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일월(日月)과 오악(五嶽)을 그려 궁궐 주요 전각의 용상(龍床)이나 국왕이 친림하는 왕실 행사에서 옥좌 뒤에 세우는 병풍.

개설

일명 ‘오봉병(五峰屛)’, ‘일월병(日月屛)’,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라고도 칭한다. 용상과 옥좌 뒤에 세우는 삽병(揷屛) 형식과 6폭, 8폭, 12폭 등의 병풍 형식이 있다. 그림의 주요 소재는 하늘의 해와 달, 첩첩이 솟은 다섯 봉우리,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 굽이치는 파도, 적송(赤松) 등이다. 여기서 붉은 해와 흰 달은 음양을 뜻하며, 다섯 봉우리는 동서남북의 사방과 중앙에 위치한 영산(靈山)의 봉우리를 상징한다. 오봉산도는 왕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파랑, 흰색, 적색, 녹색, 황금색 등 아주 정밀하고 짙은 색인 극채색을 사용하였다. 현재 한국에 전하는 오봉산도는 28점으로 파악된다.

명칭

오봉도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23년 『(선조비인목후)국장도감의궤』에 등장하는 ‘오봉산병’이다. 1659년 『(효종)빈전도감의궤』에서는 ‘오봉산병’, ‘오봉병’ 또는 ‘오봉산’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또한 『승정원일기』에는 ‘오봉병풍’, ‘오봉산병’, ‘오봉도’ 등의 용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숙종실록』에는 ‘어좌오악병(御座五岳屛)’이라는 용어로 나타나며, 『고종실록』에는 ‘오봉도’로 나타난다(『숙종실록』 3년 2월 27일), (『고종실록』 37년 6월 4일). 정조대 『일성록』에는 ‘일월병’이라는 명칭도 사용하고 있어서 조선시대 오봉산병풍에 대한 명칭은 매우 다양하게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변천

대개의 명칭에서 ‘일월’이 제외된 채 ‘오봉’ 또는 ‘오악’으로 총칭되고 있다. 그 이유는 1659년(현종 즉위)에 제작된 『(효종)빈전도감의궤』의 내용에서 추정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효종이 죽은 뒤 혼전에 배치할 닫집[唐家] 내의 삼면(三面) 오봉산병풍에 대해 ‘오봉산병풍 3좌를 마땅히 새로 조성’하는데, 오봉산병에는 “오채(五彩)로 오봉산, 적송, 수파(水波)를 그린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1675년(숙종 1) 편찬된 『(현종)빈전도감의궤』에서도 보인다. 이를 통해 현종대 이전 오봉병에는 일월이 반드시 그려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명칭에서도 일월은 제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유도원(柳道源)의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考證)』에 실린 닫집에 대한 주석에 오봉병이 등장한다. 여기서 어탑 위에 설치하는 닫집 북면에 오봉을, 동서에 여록(餘麓)을 그려 넣고 일월경(日月鏡)을 단다고 하였다. 따라서 앞서 『(효종)빈전도감의궤』의 오봉산병에서 일월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오봉병에 해와 달을 그려 넣는 대신 상의원에서 동철사(銅鐵絲)를 이용하여 일경과 월경을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오봉산도에 일월경을 조합시킨 입체적 조형물로 제작된 것이었으며, 이러한 사례는 1590년(선조 23)에 문정전(文政殿) 어좌의 일월경과 휘장 등을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용의자의 체포를 명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선조실록』 23년 3월 28일).

이후 1757년(영조 33) 2월에 영조는 정성왕후의 국상에 쓰일 오봉산도에 일월경을 대신하여 일월을 니금은(泥金銀)으로 직접 그려 넣을 것을 명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 정조 역시 영조의 국상에 일월경 사용을 중지시키고, 오봉산도를 새로 제작할 때에는 니금은을 사용하여 일월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니금은으로 그리던 일월을 19세기 이후에는 붉은색과 흰색 안료로 채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내용 및 특징

현존하는 일월오봉도는 진채로 채색되어 장식성이 매우 강하며, 여기서 하늘의 해와 달은 음과 양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는 사방과 중앙을 상징한다. 화면 양 끝에 멋지게 가지를 뻗은 적송을 배치하고, 가운데에 다섯 개 산봉우리를 그렸는데, 먼저 중악이 가장 맨 앞에 크게 자리하고 중악을 중심으로 2개의 산봉우리들이 짝을 이루어 좌우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해와 달은 좌우 2개의 산봉우리 중앙에 각각 위치하고 산곡을 가로질러 세차게 흘러내린 물은 대해와 결합하여 포말을 일으킨다. 또한 소나무는 곧고 푸른 기상과 장수를, 물은 조화와 영속성을 상징한다.

오봉산도에 나타나는 주요 소재는 아래의 『시경』「소아」의 ‘천보(天保)’에서 달과 해, 남산, 소나무 등에 비유하여 왕의 덕을 칭송하고 왕에 대한 하늘과 조상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보름달이 되려는 달처럼[如月之恒(여월지항)]

떠오르는 해처럼[如日之升(여일지승)]

마치 남산처럼 영원하시어[如南山之壽(여남산지수)]

이지러지지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십니다[不騫不崩(불건불붕)].

마치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무성하여[如松伯之茂(여송백지무)]

당신의 자손은 끊어짐이 없을 것입니다.[無不爾或承(무불이혹승)]

참고문헌

  • 『시경(詩經)』
  • 이성미, 『조선왕실의 미술문화』, 대원사, 2005.
  • 명세나, 「조선시대 흉례도감의궤에 나타난 오봉병 연구」, 『미술사논단』 28, 한국미술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