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事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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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관계에서 세력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며 생존하려는 외교의 한 방법.

개설

고대 중국 사회에서 기원한 사대 외교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기에 크고 작은 세력들이 투쟁을 벌이면서 생존을 위한 연대[동맹]의 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살피는 사대(事大)-자소(字小)의 원리 위에서 성립하였다. 이는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원리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진(秦)·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여 중앙집권적인 왕조가 성립하자, 사대 외교는 중국과 주변 약소국들 사이의 외교 체제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주변국들의 조공(朝貢)과 중국의 책봉(冊封)이 핵심적인 내용을 이루게 되었다. 이를 흔히 ‘사대 외교’ 혹은 ‘조공책봉 체제’라고 부른다.

책봉은 중국의 황제가 주변국 군주들에 중국식의 작위를 주어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었던 것이며, 조공은 주변국들이 이에 대한 답례로 토산물을 바치고 종속을 다짐하는 의례였다. 중국은 책봉과 조공을 통하여 주변국들을 통제하여 변경을 안정시키고자 하였고, 주변국들은 황제의 권위를 빌려 지역적 통치권과 안보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국제간의 의례가 사대 외교의 핵심적인 장치가 되었다. 중국의 정통 왕조들은 주변국들에게 조공 책봉 이외의 어떠한 ‘대등한 외교’ 관계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사대 외교는 동아시아 특유의 국제 질서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조공 체제를 모방하여 일본·여진·유구 등의 주변 이민족들에게 시혜를 베풀어 평화를 추구하는 교린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고구려·백제·신라가 각기 중국의 역대 왕조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고, 이러한 외교적 전통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왕조에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사대 외교는 동아시아 지역의 보편적인 국제 질서로서 우리 민족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러한 외교 체제 속에서 오랜 기간 전쟁을 피하고 국내외적인 정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사대의 개념은 『주례』나 『맹자』와 같은 유교 경전에 명시되어 있었다. 『주례』의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비호하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서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比小事大,以和邦國].”든가, 『맹자』의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보살피면[事小] 천하를 보존하게 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면[事大] 그 국가를 보존하게 된다[以大事小者, 保天下, 以小事大者, 保其國].”는 구절에 나타나고 있다. 이는 주(周)나라가 전국에 봉건제를 시행한 후에 종주국과 제후국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원리가 되기도 하였다. 종주국은 전국의 제후들을 책봉하고 제후국은 종주국에 토산물을 바쳐 종속의 예를 표하였다. 이러한 봉건 관계는 군현제가 시행된 진(秦)·한대에도 의제화(擬制化) 되어 중앙의 황제와 지방의 통치자들을 군신관계로 속박하는 장치로 존속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진·한이 중국을 통일하여 중앙집권적인 왕조가 성립하자, 사대 외교는 중국과 주변 약소국들 사이의 외교 체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주변국들의 조공과 중국의 책봉이 핵심적인 내용을 이루게 되었다. 이를 흔히 ‘조공 체제’니 ‘책봉 체제’ 혹은 ‘조공-책봉 체제’라고 불렀다.

책봉은 중국의 황제가 왕족·귀족이나 공신들을 왕(王) 또는 공(公)·후(候)·백(伯) 등의 작위에 임명하는 것이지만, 주변국 군주들에게도 이와 유사한 작위를 주어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책봉은 황제가 죽책(竹冊)이나 옥책(玉冊)으로 된 고명(誥命)을 주는 것이며, 금인(金印) 등의 인신(印信)과 예물이 부가되었다. 조공은 이에 대한 답례로 주변국들에서 중국에 토산물을 바치고 종속을 다짐하는 의례였다. 책봉은 주변국의 왕에게만 한하지 않고 그들의 왕비와 태자(太子)·세자(世子)들에게 시행되기도 하였다. 중국의 책봉은 주변국의 왕위를 지명하거나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고 각 왕들의 즉위를 사후 승인하는 하나의 의례적 절차였다. 대개의 경우 중국은 주변국들의 요청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책봉을 시행하였지만, 14세기 원(元) 간섭기에는 황제들이 고려의 왕들을 수시로 교체하기도 하였고, 여말선초에는 명태조홍무제(洪武帝)가 여러 가지 핑계로 책봉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황제의 책봉이 왕들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얻기 위하여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은 책봉과 조공을 통하여 주변국들을 통제하여 변경을 안정시키고자 하였고, 주변국들은 황제의 권위를 빌려 지역적 통치권과 안보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국제간의 의례가 사대 외교의 핵심적인 장치가 되었다.

변천

우리나라에서 중국 왕조와 최초로 조공책봉 관계를 형성한 것은 고구려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서기 32년(대무신왕 15)년과 124년(태조왕 72)에 후한(後漢)에 조공한 기록이 있었다. 이후 342년(고국원왕 12)에 전연(前燕), 425년(장수왕 13)에 북위(北魏) 등에 조공하여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등의 직함으로 책봉을 받았다. 이후 고구려는 평원왕대까지 중국의 남북조(南北朝)에 등거리 외교를 펼쳤고, 영양왕 이후에는 수(隋)·당(唐)과 항쟁을 하면서도 조공과 책봉의 사대 외교는 지속하였다.

백제는 서기 372년(근초고왕 27)에 동진에 조공한 이래 주로 중국의 남조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고, 572년 북제(北齊)에 조공한 이후 의자왕대까지 수와 당에 사대 외교를 하여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 등으로 책봉을 받았다. 신라는 624년 3월에 진평왕이 처음으로 당고조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이후 878년 헌강왕(憲康王) 때까지 왕들이 즉위할 때마다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며 그에 상응한 조공을 바치고 사대 외교를 유지하였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933년(태조 16) 후당(後唐), 939년(태조 22) 후진(後晋)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후, 6대 성종대까지 후주(後周)와 송(宋)으로부터 책봉과 인신(印信)을 받았다. 목종(穆宗)대부터 100여 년간은 요(遼)의 강요에 의한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고, 1125년(인종 3) 이후에는 금(金)으로부터 책봉과 금인(金印)을 받았다. 1234년(고종 21) 금이 멸망하고 몽골과 항쟁하면서 한동안 외교가 단절되었으나, 충렬왕 이후 충목왕대까지는 원의 부마국으로서 책봉을 받았다. 1368년(공민왕 17)에 명(明)이 건국하고 원이 몽골로 패주하자 공민왕은 1370년(공민왕 19)에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우왕은 1385년(우왕 11)에 책봉을 받았다.

이후 여말선초의 정국 혼란과 외교적 현안 때문에 창왕, 공양왕 및 조선의 태조와 정종은 명의 책봉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명은 한반도의 실체적 정권을 인정하였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정례적인 조공도 유지되고 있었다. 결국 태종대인 1401년에 명의 혜제(惠帝, 건문제[建文帝])로부터 조선 왕의 책봉 고명과 금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9월 혜제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명의 성조(聖祖)는 종전의 고명과 인신을 취소하고, 1403년(태종 3)에 새로이 책봉을 시행하였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모두 즉위 초에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이러한 전통은 1644년(인조 22) 청(淸)이 중원을 지배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선은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고 예를 다하여 사대 외교를 지속하였다.

조선초기에 정착되어 오래 유지된 대명 사대 외교는 조선의 정치 사회를 안정시키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여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사대 외교가 장기화하면서 중화 문화에 대한 숭배가 심화되고 자립정신의 저하와 굴종적인 의식이 나타나는 등 이른바 사대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명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사대 외교의 결실이며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군사적 지원이 명에 대한 의존적인 태도와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은혜의식을 더욱 심화시키게 되었고, 모화주의 혹은 존주사상(尊周思想)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직후 반포된 대왕대비의 교서에 나타난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으로, 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면서 지성으로 섬겨 평생토록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인조실록』 1년 3월 14일).”는 표현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때문에 17세기 전반의 명·청 교체기에 유연한 외교를 불가능하게 하고 명에 대한 신의와 대의명분에 집착하여 두 차례나 호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1637년(인조 15)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 조선은 청에 대하여 전통적인 사대 외교, 즉 조공-책봉 체제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비록 강요된 것이었지만 조선은 이후 청에 대하여 충실하게 조공을 이행하였고, 이는 전쟁으로 시작되었던 양국의 관계에 200여 년간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1644년 명이 망하고 청이 중원을 지배한 후에는 조선은 대청 사대 외교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고, 이 역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중국에 대한 조공 체제를 모방하여 일본·여진·유구 등의 주변 이민족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교린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주변국들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으로 조공-회사(回賜)와 유사한 무역을 시행하고 관작을 수여하기도 하며 국경에서 시장을 열어 교역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대교린정책을 통하여 조선왕조는 장기간에 걸쳐 국제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가운데 대내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의의

사대 외교는 동아시아 지역의 보편적인 국제 질서로서 우리 민족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러한 외교 체제 속에서 오랜 기간 외적의 침입을 피하고 국내외적인 정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사대 외교가 잘 유지되었을 때는 국제적인 분쟁이 줄어들고 정치사회가 안정되었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전쟁이 일어나거나 외적의 침입을 초래하여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민족은 중국과의 사대 외교 및 주변 이민족들에 대한 교린정책을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장기간의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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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문휘고(同文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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