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分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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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재산의 증여와 상속을 결합한 전근대 용어.

개설

분재는 재산을 나눈다는 의미로, 생전에 행하는 재산 증여와 사후에 이루어지는 재산상속을 결합한 용어이다. 조선시대에는 재산상속보다는 주로 분재(分財), 분급(分給), 분집(分執), 분깃[分衿]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분급’은 나누어 준다는 뜻이므로 생전에 증여를 행할 때 적합한 용어이며, ‘분집’은 나누어 갖는다는 뜻이므로 부모 사후에 자식들이 재산을 합의하여 나누어 가질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분깃’은 두 경우 다 사용되나 특별한 사유로 행해지는 별급(別給)과 달리 ‘정당한 몫을 받는다’, 혹은 ‘몫을 나눈다’는 의미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깃[衿]’은 중세 국어의 ‘‘기티다’ 즉 ‘남기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로, 현대적 의미로는 ‘(남겨진) 몫’으로 해석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가(私家)에서는 이들 용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서로 뒤섞어서 사용하였다. 분재는 이러한 용어들을 아우르는 대표 명칭으로, 생전 증여나 사후 상속에 관계없이 쓰였다. 재산상속 문서를 분재기(分財記) 또는 분재 문기(文記)라 칭한 것에서도 이것이 드러난다.

반면 상속은 근대법적인 용어로는 ‘사람이 사망한 경우에 그의 재산이 다른 일정한 사람에게 이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속은 피상속인의 사망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생전 증여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 조선시대에는 반역 행위로 인해 적몰된 재산이 공신 등 타인의 손에 넘어갔을 때 이를 상속되었다고 쓰기도 하고, 단순히 무엇인가가 서로 이어진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여, ‘개인 가문에서 행하는 재산의 승계(承繼)’라는 특정의 의미로 상속이 쓰인 예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사후 상속보다는 생전 증여의 비중이 큰 조선시대에는 재산상속이라는 용어보다는 분재라는 용어가 더 관행과 부합하는 적합한 용어라 하겠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분재의 기본 기조는 균분(均分)이다. 균분 규정은 한국의 근세 재산상속 관행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아들과 딸에 대해 재산을 동등하게 나누어주도록 규정한 것은 동일한 유교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중국·일본 등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는 한국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다른 나라에서 균분 상속이 일시적으로 나타난 사례들은 있으나 이는 아들만의 균분을 일컫는 것이다.

중국을 예로 들면, 재산에 대한 관념 자체가 ‘동일 세대권 내의 남성의 공유물’이었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과 동일하게 재산을 나눠 받을 권리는 없었다.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것은 남성과 동등한 ‘몫으로서의 재산’이 아니라 결혼 지참금 등 특수한 목적으로 ‘시혜적 차원에서 건네지는 재산’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조의 남녀 간 균등 분재는 매우 특징적인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의 재산에 대한 균등 분배 관행은 고려조의 유제(遺制)이다. 『고려사(高麗史)』 열전 중 손변(孫抃)·윤선좌(尹宣佐)·나유(羅裕)·이자연전(李子淵傳) 등을 통해 보면 고려후기에 귀족 가문들이 균분을 행한 편린들을 찾을 수 있다. 물론 고려전기 또는 그 이전부터 균분이 행해졌을 개연성은 있으나 이를 명확히 입증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균분을 법제화하고 강력하게 사가의 분재에 관여한 것은 조선왕조에 들어서의 일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론이 있으나, 조선 왕실의 양반 세력에 대한 사회·경제적 견제의 일환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일부 소수 양반 가문에 강력한 사회·경제적 힘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고자 국가가 사가의 상속 부문에까지 관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균분 상속의 결과 많은 양반 가문의 재산이 영세해진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이 상당 부분 입증되고 있다.

5~6명 이상의 자녀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당시 가족 구조를 고려할 때 균분의 여파는 양반 가문에 기하급수적인 재산 감소를 가져왔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균분에서 딸을 점차 소외시키는 가문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딸이 재산에 있어서 권리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 한 사람이 받는 몫의 3분의 1 정도를 감하여 받는 정도였다. 그 대신 사위에 대하여 처가(妻家) 제사를 봉행할 의무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도록 하는 반대급부가 뒤따랐다.

이와 같이 분재 형태가 점차 법전의 규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이를 바로잡으려고 하거나 견제하지 않았다. 그만큼 양반 계층의 경제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므로 조선후기에는 조선초기처럼 균분을 강조할 필요도 명분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양반다운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수로 인식되어 오던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들, 나아가서는 종자(宗子)에게 재산이 집중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후 분재 관행은 지속적으로 변화하여 18세기 후반 무렵 균분은 더욱 와해된다. 딸에게만 재산을 감급(減給)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 중에서도 장자를 우대하는 분재가 여러 가문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즉 아들 사이에서도 이제 균분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한말 식민지기를 거쳐 강고하게 정착된 가부장제적 가족의 모습은 이와 같은 장자 위주의 재산상속과, 그와 함께 진행된 장자 단독 봉사(奉祀) 관행과 무관하지 않다. 가족을 경제적으로 유지하는 강력한 수단의 하나가 분재이므로, 분재 방식의 장자 위주의 변화는 직계 가족 구조의 공고화를 낳는 토대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변천

분재에 관한 규정은 『고려사』 형법지(刑法志) 공양왕조(恭讓王條)의 기사 등 고려말의 기록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료상에 정리된 형태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신라 등 고대 사회에서도 분재는 행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 사회에 사유 재산 제도가 형성된 이래 분재 행위는 지속되어 왔을 것이다. 조선초기 실록에는 분재에 관한 법제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정착하기까지 조정에서 오간 논의가 상세히 실려 있어 법제가 정비되고 관행화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분재에 관한 정비된 규정은 『경국대전』형전(刑典)사천조(私賤條)에 나와 있다. 사천조에 수록된 이유는, 분재가 재산을 나누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때 재산을 대표하는 것이 노비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재산으로는 노비와 토지가 일컬어지나, 조선전기까지는 그중 노비가 보다 가치 있는 재산으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토지는 공식적으로 매매가 금지된 재산인 데에 비해 노비는 매매가 자유로웠고, 당시 토지 생산성이 높지 않아 꾸준한 수확량의 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반면 노비는 재생산을 통해 증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와서 이 둘의 재산적 가치는 역전되었다. 양난을 거치면서 도망 노비의 증가 등으로 노비 관리가 어려워진 반면, 중국으로부터 강남 농법이 도입되는 등 토지 생산성은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초기에 성립된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노비를 통한 재산 관련 법규가 정비·수록된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의 끝에 ‘전택동(田宅同)’이라는 말을 붙여 토지나 가사(家舍) 등에 대해서도 노비에 관한 법제와 동일한 규정을 적용한다는 것만 밝히고 있다.

법전에 실린 분재에 관한 규정은 다양하나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子)·여(女)를 불문하고, 그리고 존(存)·몰(歿)에 관계없이 균분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는 아들이건 딸이건, 분재 시점에 살아 있는 자이건 사망한 자이건 관계없이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 밖에는 서자(庶子)에 대한 분재 방침이나 승중자(承重子) 등에 대한 지침들이 추가적으로 실려 있을 뿐이다. 이러한 법전의 규정은 원리상으로는 조선의 전 기간에 걸쳐 지배했고, 실질적으로는 17세기 중반까지 지켜졌다.

17세기 중반 이후 균분 원칙이 조금씩 와해되기 시작했으나 이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였다. 점차 종법적(宗法的) 가족 질서가 정착하면서 재산의 균등 분재로부터 아들 위주, 나아가 장자 위주의 분재로 이행하였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일 뿐 균분의 이념만큼은 조선말기까지 유지되었다. 17세기 후반의 분재기에서 균분을 하지 못하는 이유와 명분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균분 이념에 반하는 재산상속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파격적인 행위였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의의

조선시대의 분재는 상속보다 생전 분재가 그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그 주체는 상속인이 아니라 피상속인, 즉 재주(財主)였다. 부모가 분재를 하지 못하고 사망하면 자식들이 모여 부모의 재산을 나눠 갖지만, 이때에도 부모 생전의 의사를 중시했다. 결국 생전이든 사후든 분재의 주체는 부모이지 자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 근세의 상속 관행은 ‘재산상속’이라는 현대적 용어보다는 ‘분재’라는 용어를 썼을 때 그 의미가 더 정확히 전달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주수, 『친족·상속법』, 법문사, 1991.
  • 문숙자, 『조선시대 재산상속과 가족』, 경인문화사, 2004.
  • 이광규, 『한국가족의 구조분석』, 일지사, 1975.
  • 최재석, 『한국가족제도사연구』, 일지사,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