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공마(歲貢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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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도 목장에서 해마다 200필씩 중앙에 바치던 제주공마.

개설

조선시대 제주도 목장에서 길러 중앙에 바치던 말을 제주공마(濟州貢馬)라 한다. 여기에는 연례적으로 바치는 세공마(歲貢馬), 설날·동짓날 및 왕의 탄일에 바치는 삼명일진상마(三名日進上馬), 연례진상마(年例進上馬) 등의 연례공마(年例貢馬)와 3년마다 바치는 식년공마(式年貢馬) 등이 포함되었다. 그밖에 체임마(遞任馬), 어승별마(御乘別馬), 헌마(獻馬), 교역마(交易馬) 등을 바치기도 하였다. 제주공마의 규모는 대개 세공마 200필, 삼명일진상마 60필, 연례진상마 8필 등 연례공마 268필에, 식년공마 300필, 부정기적으로 보내는 노태마, 훙구마를 포함하면 600여 필에 이르렀다. 공마는 공마선(貢馬船)에 실려 조천포(朝天浦) 등을 출발하여 해로로 진도나 해남 등을 경유한 뒤 육로로 중앙에 운송되었다. 중앙에 도착한 제주공마는 사복시(司僕寺)에 보내져 어승마(御乘馬)나 군마(軍馬), 가교마(駕轎馬), 역마(驛馬) 및 종마(種馬) 등으로 이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제주공마는 1398년(태조 7) 3월에 제주도에서 세공마 100필과 소 100두를 바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세공마를 포함한 연례공마 268필과 식년공마 300필, 그리고 노태마 10필, 훙구마 10필, 체임마 10필 등 대략 600여 필을 매년 제주도 각 목장에서 조달하였다. 제주공마가 조천포, 화북포(禾北浦)에 집결하면 공마선 10척에 격군 10명과 말 30필씩 나누어 싣고, 해로를 통해 남해안 지역의 어란(於蘭), 갈두(葛頭), 관두(館頭), 강진(康津) 등으로 이송하였다. 그 뒤에는 각 읍에서 징발한 견마군(牽馬軍)이 육로를 통해 중앙의 사복시로 운송하였다. 제주공마는 주로 사복시와 살곶이목장에 보내져, 어승마나 각 군영의 군마, 역마, 가교마 등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명나라에서 외교적으로 말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1430년(세종 12)에는 명나라에 바칠 세공마를 확보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점마별감이 도절제사와 같이 상정(詳定)한 척수(尺數)에 의해, 3세의 아마(兒馬) 2필을 훈련된 장대한 말 1필과 교환하여 이를 각 고을에 분배해 기르게 하고, 경기도의 각 목장에 있는 아마는 모두 사복시로 집합시켜 교환한 뒤 각 고을에서 나누어 기르다가 바치게 하였다. 또 이때 명나라에 바칠 별마(別馬) 및 세공마의 크기도 정하였는데, 별마는 높이 6척 이하 5척 8촌 이상으로 하고, 세공마는 주척(周尺)을 사용해 5척 7촌 이하 5척 4촌 이상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와 같이 제주도 목장은 양마를 길러 내는 국영 목장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세공마를 공급함으로써 국방·외교·교통 등의 측면에서 마정(馬政)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인 1629년(인조 7)에서 1893년(고종 30)까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록된 세공마의 공납 실태를 집계해 보면, 총 234회에 걸쳐 평균 200여 필씩 무려 47,000여 필이 중앙에 공급되었다. 특히 순조 연간에는 총 4,315필의 세공마가 공급되어, 사복시에 2,781필, 병조에 74필, 훈련도감에 968필, 금위영과 어영청에 각각 246필씩 분급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남도영, 『제주도목장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2001.
  •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6.
  • 정창조 외, 『제주마의 보호증식과 이용성 확대방안에 관한 연구』, 제주대학교 농업대학, 1981.
  • 고창석, 「원대의 제주도 목장」, 『제주사학』1, 1985.
  • 남도영, 「조선시대 제주도 목장」, 『한국사연구』4, 1969.
  • 조병로, 「조선전기 역로의 정비와 역마확보」, 『소헌남도영박사고희기념사학논총』, 태학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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