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私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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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용도로 제작한 개인용 인장.

개설

사인(私印)은 주로 서화나 서책, 간찰 등에 사용하는 개인의 인장(印章)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인장’ 혹은 ‘도장(圖章)’이라고 한다. ‘인(印)’은 관인과 사인을 포괄하며 진(秦)나라 이후 현재까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다. ‘인장’은 모두 ‘인’의 뜻인 ‘인’과 ‘장(章)’이 결합된 합성어이며, 오래 전부터 관·사인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정착되었다.

성희명(盛熙明)은 『법서고(法書考)』에서 “칠웅 때에 신하의 인장을 처음으로 ‘인’이라 칭했다.”고 하여 전국시대부터 사용하였음을 밝혔다. 또 주검심(朱劍心)은 『금석학(金石學)』에서 『한구의(漢舊儀)』를 인용하여 “진나라 때 천자만이 ‘새’와 ‘보’를 사용한 이후 군신은 감히 쓸 수 없어 ‘인’이 생겨났다.”고 하여, 본래 신분에 의해 분리된 용어임을 언급하였다. 사인은 신분에 의해 분리된 ‘인’자에 개인을 뜻하는 ‘사(私)’자가 더해져 ‘관인’과 분리된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전각에 대한 연구와 취미를 ‘사인지학(私印之學)’이라 하고, 속칭 ‘도장벽(圖章癖)’으로 부른다고 하였다. 도장벽에 포함되는 활동으로 인석(印石)·인색(印色)·인보(印譜)를 들고, 대개 송 휘종대(1119~1125)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도장’ ‘도서(圖書)’ ‘도서(圖署)’와 같이 그림 ‘도(圖)’ 자가 인장의 의미에 포함된 시기는 대체로 송대로 전해지며, 주로 ‘도서’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서’는 그림이나 서적에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도서(某某圖書)’로 제작하여 사용하면서 인장의 이칭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도장’과 ‘도서’가 주로 사인의 의미로 정착되었다. 이에 대해 강세황(姜世晃)은 『표암유고(豹菴遺稿)』에서 “사인을 도서라 함은 잘못이니 가소로움이 이와 같다. 중국인의 도서에 대한 명칭도 역시 잘못되었다. 대개 옛 사람이 인장에 ‘모인도서(某人圖書)’라 새겨 소장한 그림이나 책에 찍었으니 사인의 명칭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마침내 도서가 사인과 혼칭되고 있으니 역시 크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내용 및 특징

사인은 찍어서 효력을 발휘하므로 찍힌 사례가 중요하다. 사인이 찍힌 대상은 점토·와당·전돌·도자 등 종이 외의 물질이 있고, 문서·책·간찰·서화 등이 있다. 인장을 개인의 신분이나 서화의 일부로 인식하던 데서 나아가 독립된 예술 분야로 취급하면서부터 인보가 출현한다. 사인의 인영(印影)을 모은 인보는 ‘인존(印存)’, ‘인집(印集)’, ‘인회(印滙)’, ‘인수(印藪)’ 등 다양한 이칭으로 불리며 서화가나 호사가들 사이에서 한정된 양으로 제작되어 감상과 수장의 대상이 되었다.

인보는 사인을 중심으로 시대·문중·개인별로 수집한 사례가 많으며, 주로 책의 형태로 제작하였으나 간혹 병풍이나 낱장으로 전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후기에 인보를 제작 수집하는 경향이 서화가나 수장가들 사이에서 보인다. 문헌 기록을 통해 볼 때 조선에 인보가 처음 유입된 시기는 16세기 말을 넘지 않는다. 이른 시기의 기록은 장유(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로 북송에서 제작한 인보가 조선에 유입된 사례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인보의 분류와 정리는 사인 연구의 기초 작업이자 선행 과제이다. 인보는 수록한 인영의 시대에 따라 고인의 인영을 모은 고인보(古印譜)와 당대 인물의 것을 모은 경우로 구분할 수 있고, 제작 주체에 따라 왕실과 사가의 사례가 있으며, 한국본·중국본·일본본 등 국가별로 구분할 수 있다.

변천

한반도에서 출토된 이른 시기의 인장 유물로 낙랑의 사인이 있다. 주로 한족(漢族)의 유물이지만 무덤의 부장품에 포함되어 피장자(被葬者)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대부분 인면(印面)에 ‘왕근신인(王根信印)’·‘왕야지인(王野之印)’ 등 성명이 새겨져 있으며, ‘영수강녕(永壽康寧)’이란 문구가 새겨진 귀뉴옥제(龜鈕玉製)의 길어인(吉語印)이 있어 주목된다.

재질은 옥, 동, 석, 도, 목 등으로 분류된다. 한대(漢代)의 인장은 재질이 대부분 옥이나 동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낙랑의 목인은 한대의 제도와는 또 다른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장의 손잡이는 거북 형상의 귀뉴(龜鈕), 어떤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수뉴(獸鈕)가 있고, 타원형 뉴(鈕), 뉴 없이 양면으로 제작된 사례도 있다.

고려시대의 사인은 청동으로 주조한 동인이 주류이며 흔히 ‘고려동인’이라 칭한다. 현전하는 고려의 인장 중 관인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이 고려동인이다. 고려동인은 재료와 뉴식(鈕式), 인문(印文)에서 조선시대와 확연히 구분된다. 현재 중앙박물관·공주박물관·광주박물관 등 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성암고서박물관·온양민속박물관·호림박물관 등 사립박물관, 고려대·경북대 등 대학박물관을 포함하여 일부 개인이 소장하고 있고, 해외에 유출된 경우도 있다. 한편 일본에도 고려동인과 유사한 형태의 고인이 ‘사인(糸印)’이란 이름으로 전한다. 인문을 판독하기 어려워 ‘수수께끼 인장’이라고도 하는데, 문진이었거나 완구의 일종이라는 견해, 운남에서 기원한 인장이라는 해석 등이 있었으나 확정하기 어렵다.

조선시대 사인은 종류가 많아 다양한 분류가 가능하다. 크게 ① 성명자호인(姓名字號印), ② 사구인(詞句印), ③ 수장·감상인(收藏·鑑賞印), ④ 봉함인(封緘印), ⑤부인도서(婦人圖書)로 나눌 수 있다. 성명자호인은 성명·자·호를 비롯하여 별호·당호·관향 등을 담고 있다. 사구인은 시구나 문장을 새긴 인장으로, 경전·감계·길상의 내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수장·감상인은 주로 서화나 서책에 소유나 감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인장으로, ‘~비급(~秘笈)’, ‘~영보(~永寶)’, ‘~장서(~藏書)’, ‘~가장(~家藏)’, ‘~진상(~眞賞)’, ‘~진상(~珍賞)’, ‘~도서기(~圖書記)’ 등 다양한 문구로 나타난다. 봉함인은 간찰의 겉봉을 봉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장으로 인곽(印郭), 서체(書體), 포치(布置)의 측면에서 다른 사인과 구분되는 특수한 양식을 가진다. 문구는 봉함구(封緘句), 경전구(經傳句), 길상구(吉祥句), 기원구(祈願句), 공경구(恭敬句) 등 다양하다.

부인도서는 여성들이 사용했던 사인이다. 조선시대에 남성들은 서명에 착명·서압을 사용하였으나 여성들은 인장을 신표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다른 사인과는 달리 주로 증빙의 성격을 지닌 문서에 사용되었다. 인문은 조선 초기에는 ‘○鄕○氏(某鄕某氏)’로 하였고, 이후 주로 ‘○妻○氏(某妻某氏)’로 나타난다.

참고문헌

  • 『계곡만필(谿谷漫筆)』
  • 『표암유고(豹菴遺稿)』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張錫瑛, 『中國古代璽印』, 地質出版社, 1995.
  • 荻野三七彦, 『印章』, 吉川弘文館, 1966.
  • 朱劍心, 『金石學』, 臺灣商務印書館, 1995.
  • 韓天衡 編訂, 『歷代印學論文選』, 西泠印社, 1999.
  • 新關欽哉, 『ハンコの 文化史』, PHP硏究所,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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