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난전(禁亂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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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전·시전 상인에게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적인 유통과 판매를 인정한 권리.

개설

17세기 전반 상품경제의 발달로 시전(市廛)상인이 아닌 자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시전상인들은 자신들의 영업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양란 이후 세입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청나라에 바쳐야 하는 세폐(歲幣) 부담 등의 세출은 점점 확대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에서는 상인들의 재정 지원이 필요하였고 이에 정부와 시전상인의 상호 필요성에 따라 일종의 대상(代償)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금난전권이다.

금난전권은 서울 도성 안과 도성 밖 10리 안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에서 특정 시전이 특정 상품을 독점하여 팔 수 있으며, 이를 위반하는 상인을 제재할 수 있는 상업상의 특권이었다. 다시 말해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란, 서울에 들어오는 모든 상품은 반드시 시전상인에게 판매해야 하고, 또 서울에서 판매되는 모든 상품은 반드시 시전에서 직접 구입하거나 시전에서 구입한 상품을 판매하는 소매상에게 구입해야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시전에게 금난전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특정의 몇몇 시전에만 금난전권이 주어졌다. 그러다가 18세기 전반에는 모든 시전에 금난전권이 부여되었다. 이에 금난전권을 가질 목적으로 비시전계 상인들은 다양한 시전을 개설하게 되었다.

다양한 시전이 개설되고 이들이 금난전권을 행사하면서 도시 소비자나 영세 소상인, 소규모 생산자층에게 미치는 폐단이 커졌다. 상품 공급을 독점하여 물가가 올랐을 뿐 아니라, 권력이나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사상도고(私商都賈)와 같은 대상인(大商人)에게는 금난전권을 적용하지 못하고 영세 소상인이나 수공업자에게만 금난전권을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하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정부에서도 서울의 상품유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물가가 급등하는 것에 대해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1791년(정조 15) 2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공포하여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였다.(『정조실록』 15년 1월 25일).

내용 및 특징

16세기까지 금난전권과 관련된 규정은 없었다. 그때까지 비시전계 사상(私商)들의 성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 조선 정부는 도량형을 속이거나 물가를 조종하는 등의 불법적인 상거래를 단속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주관하는 부서도 평시서가 전담하다가 한성부·사헌부도 단속 권한을 갖는 등 자주 바뀌었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비시전계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시전상인들은 자신들의 영업 이익을 보장받기 원했고, 정부는 상인들의 재정 지원이 필요하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황폐화되어 세입은 크게 줄었지만 청나라에는 더 많은 공물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금난전권을 통해 시전상인의 상품 독점권을 인정해 주었다.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은 처음부터 모든 시전에 일률적으로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각 시전마다 부여한 권리였다. 9개 시전은 한성부에서 금리를 파견하여 금하였고, 5개 시전은 시전상인이 체포하여 고발하면 형조·한성부·사헌부에서 처벌하였다. 그 밖의 시전에는 금난전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전이 크게 늘면서 모든 시전에 대해서 9개의 시전처럼 한성부에서 금리를 파견하여 금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이러한 금난전권의 핵심은 첫 번째, 난전의 규정이다. 즉, 어떠한 상업 행위와 상업 행위자를 난전으로 규정하는가였다. 이 역시 상품경제가 발전하면서 그 개념이 확대되어 갔다. 17세기 후반에는 난전 개념이 시안(市案)에 등록되지 않은 자, 즉 시전상인이 아닌 자들의 상업 행위를 가리켰다. 그러나 1706년(숙종 32)에는 시안에 각 시전의 전매 상품을 기록하면서, 시전상인이라도 자신들의 시전 상품이 아닌 상품을 판매하거나 영업 구역을 넘어서는 상업 행위까지 포함되었다. 나아가 시전 체계의 하부에 종속되었던 중간상인인 여객주인(旅客主人)·중도아(中都兒) 등이 시전을 정점으로 한 유통 체계를 벗어나 벌이는 상행위까지 포함되었다. 결국 18세기에는 난전 개념이 시안에 등록되지 않은 상인들의 자유 상행위는 물론, 시안에 등록되지 않은 물종을 판매하는 시전상인의 행위, 그리고 시전 체제의 유통 체계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확대되고 있었다.

금난전권의 두 번째 핵심은 권리의 내용이다.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란 원론적으로 보면 서울에 들어오고 서울에서 판매되는 모든 상품은 반드시 시전상인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시전상인들이 행사할 수 있었던, 혹은 난전 상인에게 제재할 수 있었던 권리는 두 가지였다. 먼저, ‘난전인 착납권(亂廛人捉納權)’으로, 시전상인이 난전 상인을 붙잡아 사법기관에 넘겨 처벌을 받게 하는 권한이었다. 다른 하나는, ‘난전물 속공권(亂廛物屬公權)’으로 난전에서 다루는 상품을 압수하는 권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도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다.

변천

난전인 착납권은 처음에는 사헌부 등 삼법사(三法司)에서 직접 난전을 단속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는 난전 상인뿐 아니라 시전상인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다. 삼법사는 난전을 단속하며 받는 속전으로 각종 경비와 금리들의 급료를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단속에 나섰다. 그렇기 때문에 시전상인의 거래도 위축시켰다. 그래서 1688년(숙종 14) 이후에는 시전상인들이 직접 난전을 단속해서 삼법사에 넘기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다만 난전을 단속하는 주관 기관인 사헌부에서는 직접 난전 행위를 단속할 수 있었다. 난전물 속공권도 처음에는 속전, 즉 벌금을 징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다가, 1720년 이후부터 난전 상품 전체를 압수하는 제도로 변화되었다.

금난전권의 권리 내용도 18세기 중·후반에 걸쳐 전개된 다양한 난전 활동과 상품 경제의 발전에 따라 변화되었다. 18세기 이후 서울 인구가 3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면서, 서울 주민들의 수요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시장 규모도 도성 안에서 점차 도성 밖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서울 주민들의 광범한 수요가 있는 어물·미곡 등 일상 필수품 판매는 수백 명 규모의 시전상인만으로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그러므로 싸전[米廛]과 어물전의 경우에는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영세 소상인에게 자유로운 영업 행위를 허용하는 대신에, 이들에게 일정액의 세금을 거두어 금난전권의 특권을 행사하였다. 즉, 금난전권의 권리 내용이 난전인 착납권과 난전물 속공권에서 하부 소상인에 대한 수세권으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금난전권은 1791년(정조 15) 신해통공 이후 금난전권을 잃은 시전들로까지 확대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금난전권을 획득하기 위해 다양한 시전이 생겨나고, 이들의 지나친 금난전권 적용은 큰 폐단이 되었다. 시전상인의 독점으로 서울의 상품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미곡과 같은 생필품의 가격이 급등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거기에 금난전권의 적용 대상이 사상도고와 같은 대상인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상업에 나서는 영세 소상인이나 소상공업자에게 집중되었다. 이에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없애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정부에서도 서울의 상품유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물가가 급등하는 것에 대해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1791년(정조 15) 2월 신해통공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을 혁파하였다.

신해통공 이후 금난전권을 박탈당한 일반 시전상인들은 이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시전에서 독점 물종을 판매하는 상인들에게 일정액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이고, 이를 통해 시전상인들이 국가에 지고 있던 재정 부담을 충당하였다.

참고문헌

  •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4.
  • 고동환, 『조선 후기 서울 상업 발달사 연구』, 지식산업사, 1998.
  • 변광석, 『조선 후기 시전상인 연구』, 혜안, 2001.
  • 이태진 외, 『서울 상업사』, 태학사, 2000.
  • 이욱, 「18세기 말 서울 상업계의 변화와 정부의 대책」, 『역사학보』 142,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