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가(番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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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자기 차례의 번을 서는 대신에 내는 포나 돈.

개설

조선전기의 군역은 실제 군사 활동을 하는 정군(正軍)과 그 군사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담당하는 보인(保人)의 2가지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정 기간 서울로 번상(番上) 와서 중앙의 군사로, 혹은 지방이나 변경에서 유방(留防)하여 지방군으로 복무하는 정군들은 그들에게 배속된 2~4명의 보인들에게 포[保布]를 거두어 군사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였다.

비록 보포(保布)를 받는다 하여도 정군으로서는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일정 기간마다 번상하거나 유방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런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전쟁이 없이 평화 상태가 계속되자 군인들은 군사 활동보다는 각종 사역에 동원되었다. 이에 번상병들이 보포로 사람을 사서 자신의 번상을 대신하게 하는 편법이 생겨났다. 보통 대립제(代立制)라고 부르는 이 방식은 처음에는 번상정병과 대립인(代立人) 사이의 사적인 계약으로 성립하였다. 그러나 점차 이것이 관행화되고 또 그에 따른 폐단이 나타나면서 국가가 개입하여 군인들의 번상을 면해 주고 그 대신 포를 병조(兵曹)에 납부하게 하였다(『중종실록』 33년 10월 13일). 한편 지방에서는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萬戶) 등 군사 지휘관들이 사리 추구의 방편으로 유방하는 군사들에게 번을 서는 대신 베나 돈을 내라고 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와 같이 번가(番價)는 16세기 이후 중앙과 지방의 수포제(收布制) 하에서 군인들이 번상이나 유방 등 실제로 번을 서는 대신에 바치던 포나 돈을 지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번가는 풍년·흉년에 따른 곡식의 가격 변동과 면포의 생산량에 따라 달라졌지만, 특히 중종대 후반기에는 번가가 폭증하였다. 성종대에는 3개월에 17~18필(疋) 하던 번가가, 중종 후반기에 이르면 1번(番)의 대가로 100필을 받을 정도로 증가하였다(『중종실록』 31년 1월 11일). 대립자들은 역이 힘들다고 하면서 번가를 계속 올려 받았고, 각사의 관속들은 보병들이 직접 군역을 지려는 것을 방해하면서 번가를 받아 냈다. 이와 같이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번가의 폭등 속에서 군인들이 고통을 겪자 정부에서는 대립가를 정하고, 이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방식을 추진하였다. 즉 1541년(중종 36) 동지사(同知事)양연(梁淵)의 발의로 대립가를 병조 소속의 사섬시(司贍寺)에서 관장하게 하는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이 공포되었다.

변천

중종대에 국가가 대립가를 정하는 군적수포법이 실시되었으나 이는 중앙군 중에서 보병에 한한 것이었고, 기병이나 갑사(甲士), 그리고 지방 육군과 수군은 제외되었다. 이들에게까지 번가를 거두고 귀가시킨다는 것은 국방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각급 지휘관들이 군역 복무를 하러 온 군사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 대가로 번가를 거두는 방군수포(放軍收布)라는 불법행위가 공공연히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편, 『한국 군제사: 근세 조선 전기편』, 육군본부, 1968.
  • 김종수, 「16세기 갑사(甲士)의 소멸과 정병(正兵) 입역의 변화」, 『국사관논총』 32, 1992.
  • 김종수, 「17세기 군역제의 추이와 개혁론」, 『한국사론』 22,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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