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풍도(豳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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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詩經)』의 「빈풍편(豳風篇)」을 묘사한 그림.

개설

『시경』의 「빈풍편」은 주나라 주공(周公)이 섭정을 그만두고 조카인 성왕(成王)을 등극시킨 뒤,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성왕에게 빈나라(주의 옛 이름) 백성들의 생업에 대한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시를 그림으로 묘사한 빈풍도는 『시경』「빈풍편」의 전편, 즉 칠월(七月), 치효(鴟鴞), 동산(東山), 파부(破斧), 벌가(伐柯), 구역(九罭), 낭발(狼跋)까지 일곱 편 모두가 그려지기도 하지만, 주로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이나 잠업(蠶業)과 관련한 풍속을 월령의 형식으로 읊은 칠월편의 내용만을 그리는 경우가 많아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칠월편을 8장면으로 구성한 빈풍칠월도가 주로 제작되었다. 조선 왕실에서 빈풍도는 무일도와 함께 역대 통치자들에게 백성들의 노고와 고충을 생각하게 하는 교훈적 그림으로 기능하였으며 왕도 정치라는 유교 이념의 대표적인 시각적 표상으로 중요시되었다.

내용 및 변천

중국에서 빈풍칠월도에 대한 기록은 당대(唐代) 미술사가 장언원(張彦遠)이 847년에 엮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 처음 나타난다. 즉 진명제(晉明帝)의 작품 목록 중에 「빈시칠월도(豳詩七月圖)」가 확인되나 이 그림은 기록만으로 전한다. 현전하는 작품으로는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 활약하였던 화가 마화지(馬和之)의 「빈풍도」와 「빈풍칠월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402년(태종 2) 4월에 예조(禮曹) 전서(典書) 김첨(金瞻)이 빈풍도를 바쳐 태종이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가장 이르다(『태종실록』 2년 4월 26일). 그러나 이 빈풍도가 어떠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림 형식의 빈풍도는 1424년(세종 6)에 세종이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변계량(卞季良)에게 주공의 빈풍(豳風) 시와 무일(無逸) 서(書)의 뜻을 담아 우리나라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담은 그림을 월령 형식으로 제작하라고 지시하였다는 내용에서 확인된다(『세종실록』 6년 11월 15일). 또 9년 뒤인 1433년(세종 15)에 다시 경연에서 『시경』의 「빈풍편」을 모방하여 우리나라의 풍속을 바탕으로 한 조선식의 빈풍칠월도를 제작하라고 집현전에 지시를 내렸다(『세종실록』 15년 8월 13일). 이 기사들을 통해 조선초기에 이미 중국식의 빈풍도가 우리나라 백성들의 생활을 담은 그림으로 변환되어 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의 빈풍도가 현재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아 어떠한 내용이 묘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본국의 납세, 부과금, 부역, 농업, 잠업의 일을 채집하여 그 실상을 그리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조선 농민들의 생활이 다채롭게 묘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세종실록』 15년 8월 13일).

한편 세종은 1438년(세종 20)에 장영실(蔣英實)로 하여금 천문시계인 옥루(玉漏)를 설치한 흠경각을 세우게 하였는데, 이때 흠경각의 사방이 빈풍칠월도에 의거한 사계절의 경치로 꾸며졌다고 한다. 즉 빈풍도에 의거하여 인물, 조수, 초목 등 여러 가지 형용을 나무를 깎아 만들고, 절후에 맞추어 벌여놓았는데 빈풍 칠월 한 편의 일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20년 1월 7일).

또 중종은 경연에서 빈풍칠월도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내용으로 하는 내농작과 나례를 시행하였다. 내농작은 정월 대보름날 궁궐에서 볏짚으로 곡식 이삭을 만들어 나무 위에 걸어놓고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으로서 빈풍칠월편에 실려 있는 인물의 형상을 모방하여 밭 갈고 씨 뿌리는 형상을 만들었고 빈풍칠월도 병풍을 보고 놀이로 만들어 나례 의식이 끝나고 잡희를 공연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중종실록』 22년 12월 23일), [『중중실록』 30년 10월 15일 1번째기사]. 이처럼 빈풍칠월도는 권농책의 일환으로 제작되어 백성들의 생업에 대한 어려움을 알게 한다는 감계적 기능 외에도 하늘을 본받고 때에 순응한다는 천명의식을 표현함으로써 궁중의 중요한 시각적 매체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의 빈풍도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농가사시도」, 「농가십이월도」, 「경직도」 등의 형태로 조선 백성들이 농사짓고 베 짜는 일상생활이 지속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제의 녹취재 화제 중 빈풍칠월편을 전거로 한 화제가 정조와 순조대에 걸쳐서 8회, 헌종에서 고종까지 5회 출제되었다. 이 중에 특히 ‘엽피남무(饁彼南畝) 전준지희(田畯至喜)’, 즉 ‘저 남향 밭 비탈로 밥을 날라 오면 권농관은 이를 보고 기뻐한다’는 화제는 5회로 가장 많이 출제되었다. 또 팔월기확(八月其穫), 십월납화가(十月納禾稼), 제피공당(躋彼公堂) 칭피시굉(躋彼公堂 稱彼兕觥) 등의 화제가 반복하여 출제되었고, 1817년(순조 17)에는 칠월편이라는 제목으로도 출제되었다. 이렇게 「빈풍편」은 조선말기까지 왕들이 중요시했던 자료로서 화원들로 하여금 빈풍편의 묘사를 연마하도록 강구했던 것이다.

한편 국내에 알려진 빈풍칠월도는 총 4점으로 전(傳) 송민고(宋民古)의 「빈풍칠월도」, 전 정홍래(鄭弘來)의 「빈풍칠월도」, 작자 미상의 「빈풍칠월도」, 이방운(李昉運)의 「빈풍도첩」이 그것이다. 이방운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세 점의 작품은 모두 비단에 그려졌고 대체로 비슷한 규격으로 제작되었다. 송민고의 전칭작과 작자 미상의 작품은 석록과 석청을 사용한 진채로 채색되었으며 전자의 경우 산봉우리의 외각선 안에 금분으로 그린 금니 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궁중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 박정혜 외, 『왕과 국가의 회화』, 돌베개, 2011.
  • 정병모, 『한국의 풍속화』, 한길아트, 1998.
  • 김영욱, 「조선시대 왕실 감계화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 김현지, 「조선 후반기 세시풍속도 연구」, 『역사민속학』 43, 한국역사민속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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