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만(仕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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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사만 |
한글표제 | 사만 |
한자표제 | 仕滿 |
관련어 | 고만(考滿), 개만(箇滿), 시정인천전법(侍丁人遷轉法), 오고삼상(五考三上), 삼고이상(三考二上) |
분야 | 정치/인사/관리 |
유형 | 개념용어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최이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만(仕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6년 4월 12일, 『세종실록』 1년 3월 28일, 『세종실록』 30년 4월 22일, 『단종실록』 즉위년 11월 8일, 『세조실록』 1년 7월 12일, 『성종실록』 2년 5월 25일, 『성종실록』 2년 6월 8일, 『정조실록』 2년 6월 4일 |
관료가 관직의 일정 임기를 마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
개설
사(仕)’는 기본적으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의미가 분화하면서 ‘사’는 근무하는 날수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즉, 1일 근무한 것을 1사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관직에 따라서 정해지는 일정한 임기를 ‘사’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사만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의 ‘사’는 일정한 임기를 의미하였고, 따라서 사만은 일정한 관직의 임기를 다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만은 고만(考滿)· 개만(箇滿) 등과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 다만, 조선초기의 경우 사만이라는 용어는 아전 이하의 직급에만 사용되었고, 성종대에 이르러서야 그 이상의 직급에도 적용되는 변화를 보였다.
내용 및 특징
사만이라는 용례는 『조선왕조실록』 1416년(태종 16)의 기록에 처음 보이나 이 의미는 임기를 채운다는 뜻과는 거리가 있었다. 즉, 이조(吏曹)에서는 ‘시정인천전법(侍丁人遷轉法)’을 제안하면서 연고가 있어 출사(出仕)하지 못한 자로 사만 100일이 된 자나, 연고가 없이 출사하지 아니한 자로 사만 30일이 된 경우는 즉시 제록(除錄)한다고 언급하였다(『태종실록』 16년 4월 12일). 여기서의 사만은 일반적인 사만의 의미와는 달리 근무 일수를 의미하였다.
사만이라는 용어가 일정 기간의 임기를 채운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1419년(세종 1)의 기록에 보였다. 이조에서 각사(各司)의 이전(吏典)으로 사만자는 필히 세말(歲末) 도목정(都目政)에서 거관(去官)하도록 하라고 하였으나, 관직의 수가 적어 일시에 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년 3월 28일). 여기에서 사만은 일정 임기를 채운다는 뜻으로, 특히 이전이 임기의 만기를 채우는 경우에 사용되고 있었다.
1448년(세종 30)에도 이전의 처우를 논하면서 좌의정하연은 지금부터 새로 입속하는 이전은 모두 권무 9품 거관 아문에 차정(差定)하고, 사만을 기다려 직임을 주어 8품 거관 아문에 옮기며, 사만을 기다려 7품을 주어 차례로 거관하면 거의 사의(事宜)에 합할 것이라고 하였다(『세종실록』 30년 4월 22일). 이 경우에도 이전이 임기의 만기를 채우는 경우에 사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사만의 ‘사’의 의미가 1일의 근무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이는 1452년(단종 즉위년)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단종은 이조에 국장도감·산릉도감·빈전도감·장생전의 녹사 및 서리들에게 매일 별사(別仕) 3일씩을 주되, 사만하더라도 도목정과 거관하는 데는 계산하지 말라고 명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11월 8일). 왕이 도감에서 수고한 서리들에게 도감의 업무에 수고한 상으로 근무 일수에 비례해서 3배의 별사를 부여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사’가 근무한 1일을 의미하였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1453년에도 보였다. 단종은 정난(靖難)하던 날에 숙직한 공을 논하면서 이조에 병조(兵曹)의 녹사·영사 및 승정원의 연리 등에게 각각 사(仕) 50을 주게 하고, 사만(仕滿)하면 도목을 따지지 말고 거관시키게 하라면서 서리들에게 상으로 별사를 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는 사 50을 주지 않고 도(到) 50을 주었는데, ‘사’라는 용어가 주로 서리에게만 한정된 용어임을 짐작하게 한다.
변천
사 혹은 사만의 용례가 서리에 대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세조대까지도 동일하였다(『세조실록』 1년 7월 12일). 그러나 세조 말 성종 초에 이르면 이러한 용례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471년(성종 2)에 교정청에 내린 왕명에 의하면, 사만으로 가계할 때에는, 6품 이상은 오고삼상(五考三上)인 자에게, 7품 이하는 삼고이상(三考二上)인 자에게 품계를 올려 주라고 하여 서리 외의 관료에게도 사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성종실록』 2년 5월 25일). 여기서 오고삼상이란 다섯 번의 고과를 치르는 가운데 세 번 이상 상등(上等)을 받는 것이고, 삼고이상이란 세 번의 고과 가운데 두 번 이상 상등을 받는 것을 말하였다. 이후 사만이라는 용어는 서리에 한정되지 않고 일반 관원이 일정 임기를 마치는 경우에 두루 사용되었다(『성종실록』 2년 6월 8일).
이후 사만의 용례는 큰 변화 없이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다. 1778년(정조 2)의 기록에 의하면 조정에서 『대전회통』을 근거로 참상은 사만이 900일이고 참하는 사만이 450일인데, 관직을 옮길 때에는 또한 품계를 올리는 것이 곧 법전의 명문이라고 언급하였다(『정조실록』 2년 6월 4일). 이는 사만의 용례가 조선후기까지 변함이 없었음을 잘 보여 주었다.
참고문헌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