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시(門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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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행과 역행 등 조선의 중국 사행시 책문에서 열렸던 무역시장.

개설

문시(門市)는 성문 밖 장시를 의미하는 일반적 용어로 쓰였다. 그러나 역사적 개념으로는 동지행과 역행 등 조선의 사행과 함께 전개된 책문 무역과 무역세 징수와 관련된 용어였다.

내용 및 특징

18세기 중반 인삼이 전국적으로 재배되고, 이를 가공한 홍삼이 청으로 밀수출되는 현상이 크게 늘었다. 1797년(정조 21) 홍삼 판매를 허락하는 대신 세금을 징수하는 포삼제는 조선 정부가 대청 외교비 마련 및 재정 확충 차원에서 홍삼 무역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포삼 무역의 권리는 처음에는 역관과 경상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차츰 개성 상인인 송상과 의주 상인인 만상(灣商)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자연히 역관과 경상을 한 부류로 하고 송상과 만상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사행원역으로서 역관이 책임을 지는 홍삼 무역량과 만상 가운데 선발된 포삼별장이 책임지는 무역량이 각기 구분되었다.

그럼에도 대청무역의 주도권은 송상과 만상에게 있었다. 송상은 포삼을 만들 수 있는 포주(包主)였고, 만상은 포삼을 팔 수 있는 별장(別將)이었을 뿐만 아니라 책문무역을 사실상 이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책문 무역이 계속 금지와 허용을 거듭한 것은 결국 역관과 경상이 만상과 송상의 사무역(私貿易)을 억제하려는 수단이었다.

그런 가운데 책문 무역이 하나의 전기를 맞는 것은 1754년(영조 30) 비포절목(比包節目)이 반포되면서였다. 비포절목은 사행이 가져가는 팔포(八包)의 액수를 규정하고 만상이 가져가는 만포(灣包)의 액수를 지키게 하고 세금을 징수하려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책문 무역은 1787년(정조 11) 불법화되었다가 다시 3년 만에 복설되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이후 계속 유지되었다.

한편 1814년(순조 14) 의주부 관세청 설치 역시 책문 무역을 공식화하고 무역세를 거두려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관세청은 책문 무역을 통제하고 교역품에 세금을 거두어 사행시 필요한 공용은을 마련하고 만상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하지만 공식 사행원의 짐에는 면세를 적용하는 관행을 악용하거나 서울 및 지방관청의 사무역임을 이유로 세금을 피하려는 폐단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폐단이 심각해지자 조선 정부는 1854년(철종 5) 「만부관세청구폐절목(灣府管稅廳捄弊節目)」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사역원에서 감세관을 파견하여 세금에서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한편, 만상의 짐에 중복되는 세금과 폐단을 없애고 만상을 보호하는 이중의 효과를 보려는 것이었다.

감세관은 사역원이 차출해서 보내지만 비변사의 관문을 발급받아 내려왔다. 그러므로 의주부를 경유할 필요 없이 중앙에 직접 보고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감세관은 1년 단위로 임명하는데, 매년 8월에 의주로 가서 다음해 5월에 올라오도록 하였다. 이렇게 임기를 정한 것은 삼문(三門)의 세금을 빠짐없이 거두려 함이었다.

삼문의 내용은 몇몇 기록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 있다. 1874년 『만부관첩』(규15135-2-1)에 “역문(曆門)에 체삼 2,825근, 직삼 8,520근, 미삼 1,975근을 들여보내고 동문(冬門)에 체삼 3,000근, 직삼 5,855근, 미삼 1,975근 합계 20,200근을 보냈다.”고 하였다. 따라서 역행과 동지행으로 열리는 책문 무역이 삼문 중 2가지인 것은 확실하였다. 역행은 음력 8월에 출발해 청의 시헌력을 받아 왔다. 동지행은 매년 음력 11월에 출국해서 이듬해 4월에 귀국하였다. 결국 감세관은 주어진 임기 동안 역행과 동지행의 책문 교역을 감독하고 무역세 징수 업무를 감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한 차례 책문 무역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거의 매년(해마다) 있었던 별행이나 중강개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이처럼 삼문이 명확하지 않음에도, 문시(門市)는 책문무역을 의미하는 단순한 용어를 넘어 중앙정부가 무역세를 부과하고 통제 관리하려 한 중요한 무역 형태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무역세가 단순히 사행 경비를 마련하는 차원을 넘어 재정 확보를 위한 방안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이철성,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
  • 유승주·이철성, 『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이항준, 「19세기 중후반 관세청에 대한 정책과 성격」, 서울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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