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포(八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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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80근을 10근씩 8개의 꾸러미[包]로 묶은 가치칭량(價値稱量) 단위.

개설

조선전기부터 사행의 공식 관원인 사행 원역(員役)에게는 여비 및 무역자금으로 은화를 가져갈 수 있게 허용하였다. 그런데 세종대 명에 대한 금·은 세공이 면제되면서 은화를 가져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 대신 한 사람마다 인삼 10근씩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명·청 교체기 조선과 명 사이의 사행로가 험난해 지면서, 종래 한 사람당 인삼 10근씩의 정액을 80근으로 늘려 책정하고, 그 인삼을 10근씩 8개의 꾸러미로 나누어 싸게 하였다. 이를 팔포라고 한다.

내용

팔포는 사행 원역의 무역자금으로 쓰였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교역을 팔포무역이라고 하였다. 팔포는 반드시 80근의 인삼으로만 계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삼은 당시 국내 생산물 중에 고가의 가치를 보유하고 중국과의 무역상 유리한 물품일 뿐이었다. 이 때문에 1682년(숙종 8) 호조 판서윤계(尹堦)의 국내 인삼이 부족하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인삼 반출을 그해부터 금지시키고 그 대신 팔포의 정액을 은화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때 은화는 당시 시가에 맞추어 인삼 1근 당 은화 25냥으로 환산하였으므로, 80근 인삼은 은화 2천 냥이 되었다. 팔포가 하나의 가치칭량의 단위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때 당상관에게는 1천 냥을 더 주어 팔포 정액 역시 당하관의 2천 냥 포와 당상관의 3천 냥 포로 구분되었다.

팔포무역의 특권은 사행 원역에게 주어진 것으로 사행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동지사의 경우는 해당 인원이 35명에 이르렀다. 팔포무역은 내부적으로 2가지의 성격을 띠었다. 하나는 정사, 부사, 서장관 및 그들과 친인척으로 구성된 자제군관(子弟軍官)의 팔포무역이다. 이들은 부연(赴燕) 그 자체가 극히 임시적이고 일회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교역은 보석류와 장신구 등 귀족적 사치 생활을 충족시키기 위한 물품을 사오거나 서적을 구입하는 등,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무역이 아니었다. 양반 계층에 대한 일종의 예우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1728년(영조 4)에는 당상·당하관을 막론하고 2천 냥으로 규모를 통일하였다. 사신과 군관의 팔포는 뭇 역관들과 달라 팔포를 기준대로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관(譯官), 만상군관(灣上軍官), 화원(畵員), 사자관(寫字官), 의원(醫員) 등의 팔포무역이다. 역관은 역관직의 세습화에 따른 종적 조직과 역관제도의 횡적 유대관계를 가지고 거의 상시적이고 연속적으로 무역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명목상 다달이 봉급이 지급되지 않는 체아직(遞兒職) 역관들에게 팔포무역의 이익금은 그들의 생계뿐만 아니라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만상군관, 화원, 사자관, 의원의 경우에도 체아직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수행한 팔포무역은 상업적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현실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팔포 정액을 쌀값으로 산정해보자. 1678년(숙종 4) 현재의 상정가로 은화 1냥은 동전 400문(文)이며 쌀 10두(斗)였다. 그러므로 당하관의 2천 냥 팔포에 해당하는 쌀은 2만두로서 1석을 15두로 환산할 때 1,333석 5두에 해당한다. 따라서 당상관의 3천 냥 팔포 미곡은 2천석이었다. 결국 동지사행의 공식 사행이 가져가는 팔포무역 즉 팔포은화는 7만 4,000냥 규모였으며, 이를 쌀로 환산하면 4만 6,333여 석에 달하였다.

팔포가 사행 원역에게 지급되는 무역자금이었다면, 중앙 관아나 지방 관아에게 지급되는 무역자금 성격의 팔포도 있었다. 이는 팔포가 가치칭량 단위로 바뀌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조선후기 대외무역이 발전하고 국내 경제가 활성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중앙 관아인 상의원·내의원은 왕실의 의복과 각종 사치품 약재 구입을, 호조는 비단·모자·상아 등의 일반 수요품을,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수어청 등은 군복과 깃발 장식을 위한 견직물과 병기 및 동전 주조의 원료들을 수입하였다. 그 밖에 양향청과 종친부에서도 중국의 물품을 수입하였다. 이는 사행원역에게 주어진 팔포와는 별도였기 때문에 별포(別包) 또는 포외별송(包外別送)이라고 불렀다. 중앙 관아 무역은 주로 역관이 대행하였다.

지방 관아의 무역권은 주로 조선과 청의 사신접대 및 군사상 무거운 군역을 지고 있던 의주부·평안감영·평안병영·황해감영·개성부 등 5군데에 주어졌다. 이들 아문에서는 지역의 유력한 상인을 무역별장(貿易別將)으로 선발하여 관아무역을 대행시켰다. 무역별장이 가진 팔포를 심양팔포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들이 주로 사행을 따라 심양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청의 물품을 매년 수입하여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무역별장 이외에 별포무역을 할 수 있는 자가 단련사(團練使)였다. 조선 사행은 1679년(숙종 5) 이후 일정한 세폐·방물을 심양에서 분납하고, 짐을 내려놓은 말은 곧 귀환하도록 하였다. 단련사는 바로 심양에서 귀환하는 인마를 이끌고 돌아오는 임무를 띤 관리였는데, 이 단련사가 무역별장들을 이끌고 함께 오갔던 것이다. 때문에 단련사가 심양에서 무역할 수 있는 권한 역시 심양팔포라고 하였다.

그런데 단련사가 이끄는 무역별장 및 상인들은 심양에서도 교역하였지만 대개는 돌아오는 길에 책문에서 중국의 물화를 많이 사왔다. 이를 흔히 단련사 후시라고 한다. 이에 심양과 책문에서 구입한 물화가 증가되어 되돌아오는 말에도 짐을 다 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단련사에게도 연복이 실시되어 의주부에서 책문으로 짐을 실을 말을 내보내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변천

팔포는 1728년(영조 4) 은화 2천 냥 정도의 가치칭량 단위로 인식되었다. 이후 팔포는 역관·사상 간의 경쟁관계, 은화 비축량의 정도, 이를 대신할 상품의 출현 등 시대의 조건에 따라 사라지거나 새로운 다른 용어로 변화되어 나타났다. 예컨대 1727년(영조 3) 청 정부가 조선 상인들이 빚진 은을 조선 정부가 상환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역관들은 이것을 사상의 무역을 억제할 명분으로 이용하여 심양팔포 무역과 단련사 제도를 혁파해버렸다. 18세기 중엽 왜관무역의 쇠퇴와 국내 은광업의 생산 감축으로 말미암아 국내 은의 비축량이 크게 줄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1754년(영조 30) 의주상인에게 책문무역을 허용하면서 각종 피물과 해삼, 다시마, 붓 등의 잡물을 은화와 함께 가지고 가도록 했다. 만포(灣包)는 이때 허가된 무역자금을 의미하였다. 1797년(정조 21)의 포삼제(包蔘制)도 자연삼이 아닌 홍삼을 팔포에 채우는 것으로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무역자금으로서의 포(包)라는 의미를 그대로 간직한 채 적용된 용어이다. 포삼제와 관련하여 나타난 포외포삼(包外包蔘), 포세(包稅) 등도 같은 맥락에서 출현한 용어이다.

의의

팔포는 인삼 80근을 8개의 꾸러미로 묶은 실물로 인식되었으나, 점차 은화 2천 냥의 공식적인 무역자금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후 팔포, 별포, 심양팔포, 만포, 포삼 등은 조선후기 대청무역의 발전과 다양한 무역 상황을 반영하는 용어가 되었다. 결국 조선후기 상인은 인삼·홍삼·해삼·종이 등 비교 우위의 경쟁력을 가진 상품을 가지고 국제무역의 장에 끼어들었고, 결국 이것이 국내 상업자본의 성장과 산업을 촉진시켰다.

참고문헌

  • 이철성,『朝鮮後期 對淸貿易史 硏究』, 국학자료원, 2000.
  • 유승주·이철성,『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유승주,「조선후기 대청무역의 전개과정-17·18세기 부연역관의 무역활동을 중심으로」, 『백산학보』8,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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