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선(減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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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음식의 양이나 가짓수를 줄이도록 조치하여 실제로 행한 일.

개설

조선왕조에서 감선(減膳)에는 3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수라상에 올리는 음식의 양이나 가짓수를 줄이는 일, 둘째는 하루에 5번 받는 음식의 횟수를 줄이는 일, 셋째는 수라상에 올리는 육고기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는 일이다. 왕이 감선을 결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연재해이다. 가뭄이나 홍수, 날씨의 갑작스런 변화, 혜성이 나타나거나 벼락이 떨어지는 등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왕은 감선을 하였다. 감선은 자연재해나 자연의 이상한 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왕이 스스로 덕(德)이 없어서 일어난 것이라고 여겨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자연재해 외에도 왕의 친척이나 아끼는 신하와 그의 친척이 아프거나 죽거나 기일을 맞이하여도 애도의 뜻으로 감선을 행했다. 심지어 왕의 요구가 신하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감선을 행했다. 감선과 철선(撤膳)이 혼용되어 쓰이기도 했다.

내용 및 특징

감선은 고대의 유학자들이 가졌던 하늘과 땅,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사상에서 나왔다. 중국 한나라 때의 동중서(董仲舒)는 황제의 덕이 부족하면 자연도 노하여 재해를 발생시킨다고 생각했다. 『진서(晉書)』「성제기(成帝紀)」에는 3월에 가뭄이 들자, 음식 장만하는 일을 맡은 태관(太官)에게 감선을 지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중국의 황제가 시행한 감선의 내용은 육고기 대신에 채소 음식을 먹거나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는 방식이었다. 즉 소선(素膳)을 감선의 일종으로 보았다. 조선왕조에서는 감선 내용이 왕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데 감선의 이유와 과정에 대해 분명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감선의 이유가 발생하면 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감선을 시행하는 교지를 내렸다. 감선의 주체는 왕이지만, 왕의 식사와 건강을 책임진 부서에 교지를 내려 감선을 실시토록 알렸다. 왕이 감선을 하면 왕비를 비롯하여 왕실의 친척과 신하들도 따라서 감선을 했다. 대왕대비가 왕의 감선을 따라 할 때는 불효가 된다고 여겨 왕이 직접 감선을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왕의 감선 기간에 도성 안에서나 바깥에서 풍악을 울리고 노는 사람에게는 상하를 따지지 않고 벌을 내렸다.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는 감선과 더불어 정전(正殿)에서 잠을 자지 않는 피전(避殿), 음악을 울리지 않는 철악(撤樂) 등의 행위도 행해졌다.

왕이 너무 엄격하게 감선을 하면 신하들은 왕의 건강을 걱정하여 감선 기간을 줄일 것을 상소했다. 만약 가뭄 중에 조금이라도 비가 내리면 왕에게 감선을 멈출 것을 청하였다. 대부분의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가뭄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감선을 이어 갔다. 심지어 가뭄이나 홍수로 감선을 할 때는 물품을 진상하는 일도 멈추도록 명령을 내렸다. 감선의 이유가 해결되면 왕은 교지를 내려서 보통 때의 식사로 되돌리는 복선(復膳)을 명령하고 감선을 멈추었다.

자연재해의 발생 외에도 왕은 여러 이유로 감선을 하였다. 그중 하나는 조상의 기일에 몸을 삼간다는 뜻으로 감선을 행한 것이다. 태조는 부친의 기일을 맞이하여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중들에게 궐내에서 불경을 읽게 하였다(『태조실록』 2년 4월 30일). 왕실 친척의 기일에 감선을 한 사례는 자연재해 다음으로 많다. 심지어 자연재해로 선왕의 능이 무너지거나 화재가 일어나면 왕은 불효로 여겨서 감선을 하였다. 왕의 친척이나 왕이 아끼는 신하와 그의 친척이 죽었을 때도 감선을 행했다. 태종은 태상왕으로 있으면서 윤곤(尹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이 대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감선하는 것은 비록 옛날의 제도에는 없지만 신하가 왕을 위하여 3년상을 행하니 임금이 신하를 위하여 3일 동안 육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라고 하였다(『세종실록』 4년 3월 11일). 그러자 신하들이 태종의 건강을 염려하여 육고기 음식을 들도록 청하니 태종은 마지못하여 따랐다고 한다. 이후 아끼는 신하가 죽을 경우에 왕이 3일 동안 감선하는 전례가 생겨났다.

변천

신라의 소지왕이 492년(신라 소지왕 14)에 가뭄이 들자 감선을 행한 일이 현재로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고려시대에도 감선은 간간히 행해졌다. 조선시대 왕들은 대부분 감선을 시행하였다. 다만 재위기간이 짧았던 정종·문종·단종·예종·인종 등은 감선을 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선왕(先王)이 돌아갔을 때 보위를 이은 왕도 3년의 국상(國喪)을 치르면서 감선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감선을 행하지 않은 왕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는 선대 조상, 고려 충선왕의 두 번째 비였던 의빈(懿妃) 등의 기일 그리고 아들이었던 이방석(李芳碩)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감선을 행하였다. 정종은 신하로부터 감선을 권유받고는 자신이 게으르므로 그것에 응하지 못하지만 노력해 보겠다는 답을 하였다(『정종실록』 2년 6월 2일). 하지만 이후의 기록에서 정종이 감선을 하였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이에 비해 태종은 감선을 정착시킨 왕이다. 태종은 재위기간에 가뭄이 드는 일이 많이 발생하자, 그때마다 감선을 행했다. 태종이 가뭄 때문에 금주령을 내리고 스스로 감선을 하자 다음 날 바로 비가 내린 적도 있었다. 이로 인해 가뭄 때 금주령과 감선은 왕이 지켜야 하는 덕목이 되었다.

세종은 점심인 주선(晝膳)을 받지 않는 것으로 감선의 범위를 확장시키기도 했다. 승정원에서는 가뭄을 우려하여 왕이 행하는 감선의 범위는 결코 점심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세종은 하루에 다섯 차례의 음식을 받기에 점심 한 차례를 감한다고 하여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여 신하들을 설득시켰다(『세종실록』18년 윤6월 7일). 세종은 감선을 하면서 동시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 세조는 장마철에 홍수가 나도 감선을 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종은 왕의 자리에 오른 해 4월에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되었기에 감선을 여러 날 시행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물에 만 밥인 수반(水飯)을 올리라고 지시를 하자, 신하들이 성종의 건강을 염려하여 보통 때의 음식을 올리겠다고 청하였다. 성종은 세종 때도 수반을 올린 적이 있다면서 청을 거부하였다. 성종은 물에 만 밥을 먹는 일도 감선의 한 가지로 보았다(『성종실록』 2년 12월 4일).

중종대에 이르자 감선은 겉치레가 되었다. 감선을 하여도 자연재해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감선을 한다고 하지만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중종은 감선만으로 하늘의 경고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실제로 하늘의 경고에 응할 방법을 찾도록 신하들에게 요구하였다(『중종실록』 15년 1월 21일). 이후에도 우박이 내리거나 일식과 월식이 생기면 왕은 감선을 행했다. 왕의 덕치를 보여 주는 데 감선이 하나의 관행처럼 행해졌다.

선조는 전쟁으로 실추된 왕실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감선을 다시 강화했다(『선조실록』 40년 6월 5일). 선조 이후 사림들은 왕으로 하여금 자연재해 때 감선을 하도록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심지어 감선을 이용하여 왕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활용하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시행하였지만 큰 변화가 없자, 자신이 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10일 동안 감선을 하였다(『영조실록』 30년 9월 23일). 감선은 자연재해가 일어나지 않아도 왕 스스로 부덕하다고 판단하면 행할 수 있는 행위가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진서(晉書)』
  • 함규진, 「조선 역대 왕들의 감선(減膳) : 그 정치적 함의」, 『한국학연구』3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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