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關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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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서와 관서 사이에 관련 업무를 상고(相考)하거나 관원을 차정(差定)하기 위해 작성·발송하는 명령서.

개설

관문(關文)은 관서와 관서 상호 간에 주고받는 관용 문서로서 흔히 이문(移文)이라 불리는 문서의 한 종류이다. 이문이라는 용어는 각종 관문서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자주 볼 수 있으나 공식 용어는 아니고 관서 사이에 오고 간 문서를 통칭하는 것일 뿐이다.

관문을 세분하면 동등한 관서에서 상호 간에 주고받는 문서,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보내는 문서, 하급 관청에서 상급 관청에 올리는 문서로 나눌 수 있다. 이중 하급 관청에서 상급 관청으로 올리는 문서는 첩정(牒呈)이라 하고, 이를 제외한 두 가지는 관(關)이라 칭한다. 즉 관은 동등한 관서 사이에서도 쓰고, 하급 관청에 어떤 사안을 내려보내는 경우에도 쓴다.

관은 흔히 관문이라고도 하고 관자(關子) 또는 관자(關字)라고도 쓰나 『경국대전』과 『전율통보』에는 ‘관’으로 쓰였다. 특히 동등한 관서 사이에 관문을 주고받는 것을 평관(平關)으로 지칭하였고, 법전에도 평관식(平關式)이 수록되어 있다. 관문으로 주고받는 사안은 관서 사이에 서로 관련되는 업무를 비교 고찰하거나, 관원을 차정하는 등의 내용이 많다. 관리의 해유(解由) 시에도 직품(職品)이 같을 경우 전임 관리가 후임 관리에게 평관 방식으로 인수인계서를 보내기도 한다.

내용 및 특징

관문은 관과 관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 즉 관-관 문서이다. 종래의 분류에 따른다면 서지적 분류로는 첩관통보류에 속하며, 발급·수취자에 따른 분류로는 관부 문서의 대관부문서에 속한다. 그러나 첩관통보류는 말 그대로 첩(牒)과 관과 통보류의 문기를 나열한 것이므로 분류로 보기에는 좀 어색한 측면이 있다. 결국 관부가 관부에 대하여 발급한 문기라는 후자의 분류를 채용하면, 이들 문서를 주고받은 대상을 중심으로 관-관 문서 정도로 쉽게 풀이할 수 있다. 관-관 문서 외에 관과 개인 사이에 주고받은 관-사 문서가 있다.

관문의 규식은 『경국대전』과 『전율통보』에 모두 평관식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양자는 규식이 거의 일치한다. 평관식으로 수록되어 있지만 『전율통보』에 “동등 이하에는 이 문서식을 쓴다.”는 부기(附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하급 관서에 문서를 내려줄 때도 평관식과 같은 형식으로 문서를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조선초기의 관문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후기 관문을 보면 동등 관서와 하급 관서에 보낸 관문에서 형식상의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은 ‘평관식’이 수록되어 있다. “모아문위모사운운합행이관청(某衙門爲某事云云合行移關請) 조험시행수지관자우관(照驗施行須至關者右關) 모아문연(인)월일모관모직압(某衙門年(印)月日某關某職押).”

관문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도 관서 사이의 평행문서(平行文書)로 쓰였다. 주로 관서 상호 간의 사순(査詢)에 이용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관서 사이에서 관련 업무를 상고(相考)할 때 사용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파악된다. 청대에 와서는 그 운용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문서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변천

관서와 관서 사이에 오고 간 문서는 고려시대에 ‘출납’으로 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조선초기까지 이어졌다. 관문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태종대부터로, 『태종실록』에서부터 ‘관문’이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일례로, 1407년(태종 7)에 관서별로 문서를 주고받는 예식을 정하여 첩정으로 해야 하는 경우와 평관을 사용하는 경우 등을 구별하고, 행수(行首)와 격자(隔字)의 방식 등을 논의한 기사가 있다.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첩정 혹은 관문을 주고받는 관서와 절차에 대한 논의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경국대전』에 평관식이 수록될 수 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문서 중 가장 오래된 관문 역시 태종대에 작성된 것으로, 1407년에 발급된 것이다. 흔히 「장성감무관자(長城監務關字)」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이 관문은 장성감무가 백암사에 보낸 문서로서 『이두집성』에 「영락정해장성감무관자(永樂丁亥長城監務關字)」라는 제목으로 전사(轉寫)되어 전하고 있다.

의의

관문의 규식과 발급 및 수취 대상 등을 통해 보면 조선시대에는 문서 행정이 매우 발달했을 뿐 아니라 규식화·계층화·다양화의 경향을 띠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려시대의 문서 규식 등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므로 고려시대의 출납 형식에서 어떻게 관문으로 발전해왔는지를 규명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당·송대부터 원·명을 거쳐 청대에 이르기까지 단편적이나마 문서의 형식상의 변화와 문서에 쓰이는 용어, 그리고 그에 반영된 의식을 규명할 자료가 남아있어 중국과의 비교를 통해 조선시대 문서 행정의 발달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문에 남아있는 ‘합행이관(合行移關)’, ‘청조험시행(請照驗施行)’, ‘수지관자(須至關者)’ 등의 투식은 중국의 관문서에서도 비슷한 것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호 간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관문은 관문서 중에서도 관과 사인(私人) 사이의 문서가 아니라 관과 관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관문이 전래된 형태는 대부분 양반가의 고문서 더미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관문의 발·수급 당사자이거나 해당 관서에서 관직을 역임한 이들이 관문을 개인적으로 소장했음에서 유래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관문서 혹은 관부·관서 문서로 지칭되는 문서들의 보존 방식이나 절차 등에 대해서도 사회사적으로 규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전율통보(典律通補)』
  • 윤병태, 『한국고문서정리법』, 한국학중앙연구원, 1994.
  • 전경목, 「16세기 관문서의 서식 연구」, 『16세기 한국 고문서 연구』, 아카넷, 2004.
  • 조선총독부 중추원 편, 『이두집성(吏讀集成)』, 조선총독부 중추원, 1937.
  •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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