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성사(啓聖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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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 및 그 제자인 안자(顔子)·자사(子思)·증자(曾子)·맹자(孟子)의 아버지를 모신 사당.

개설

원래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을 비롯하여 안자 이하 4성(聖)의 아버지인 안무요(顔無䌊)·공리(孔鯉)·증점(曾點)·증손씨(孟孫氏) 등의 신위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정전(正殿)이 아니라 양무(兩廡)에 모셔져 있었다.

성현들의 신위를 구분하여 정전과 양무에 각각 나누어 모신 것은 그들이 유학의 성행에 얼마나 공(功)을 세웠는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신위는 정전에 모셨는데, 아버지는 비교적 공이 작다고 하여 그 신위를 양무에 모시는 것은 유교의 의리론(義理論)에 비추어볼 때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성현 아버지들의 신위를 별도로 모시기 위하여 계성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계성사는 명나라 때 처음 설립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조선 숙종 연간에 도입되었으며 이후 조선말기까지 계성사에 대한 제사가 이어졌다.

내용 및 특징

계성사는 문묘의 서북쪽에 위치한 독립된 사당이다. 정전의 규모는 3칸인데, 정문은 3문(門)으로 구성되며, 서쪽에 협문이 있다. 신위는 정위(正位)인 숙량흘이 북쪽에 위치하고, 안무요·공리가 동쪽에, 증점·맹손이 서쪽에 각각 배향되었으며, 정향(程珦)·주송(朱松)·채원정(蔡元定) 등이 종향(從享)되었다.

계성사의 제사는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소사(小祀)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3품관이 제관(祭官)으로 차출되어 전사관(典祀官)·묘사(廟司)·대축(大祝) 등과 함께 의식을 진행하였다. 제사는 문묘의 석전제(釋奠祭)와 같은 날인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시행되었는데, 1896년(고종 33) 조선시대에 마지막으로 사전(祀典)을 정비할 때 2월과 8월의 첫 사일(巳日)로 날짜가 바뀌었다.

변천

계성사의 설립은 1539년(중종 34) 흠문사(欽問使)로 명나라에 갔던 이청(李淸)이 북경에 있는 문묘를 참배하고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면서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1년(선조 34) 소실된 문묘를 중건할 때 계성사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1701년(숙종 27) 4월 23일에야 성균관(成均館) 문묘 북쪽에 별도의 사당으로 건립되었고, 이때부터 계성사에 대한 제사가 본격화되었다. 두 달 뒤에는 개경에 계성사가 설립되었고, 1739년(영조 15) 6월에는 각 도의 큰 고을에도 계성사가 세워지면서 전국에서 제사가 거행되었다.

1701년 최초의 계성사 제사는 왕의 친제가 아닌 신하의 섭행(攝行)으로 이루어졌다. 왕이 문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관원을 계성사에 보내 따로 제사를 지내는 방식을 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1759년(영조 35) 왕이 면복을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시행한 뒤 바로 계성사에 가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함으로써 바뀌게 되었다. 그에 따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수록되지 않았던 계성사에 대한 제사가 영조대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에는 소사로 등재되었다.

영조 때의 친제 방식은 정조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1782년(정조 6)과 1790년(정조 14)에 왕이 계성사에서 몸소 제사를 지냈다. 그 뒤 1781년(고종 8)에도 왕이 문묘에서 전배(展拜)하고 계성사에 들러 배알(拜謁)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고종 대까지도 친제 방식이 이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선왕조록의(朝鮮王朝錄儀)』
  • 『명사(明史)』
  • 『명회전(明會典)』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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