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릉(齊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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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정비(正妃) 신의왕후한씨의 능.

개설

제릉은 신의왕후(神懿王后)한씨(韓氏)의 능이다. 조선 건국 후 제릉이라는 능호를 얻었으며, 한씨의 아들인 태종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조성 경위

신의왕후한씨는 15세 때 이성계(李成桂)와 가례를 올린 뒤 함흥 운전리(雲田里)에 살면서 뒷날의 정종인 이방과, 태종인 이방원을 비롯해 6남 2녀를 낳았다. 이후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자, 그의 안위를 걱정하다가 병이 들어 1391년(고려 공양왕 3) 9월 23일에 승하하였다. 유한우(劉旱雨)가 무덤을 정하여, 개성 해풍군치속촌에 안장하였다.

이듬해인 1392년에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뒤 한씨를 절비(節妃)로 추존하고, 능호를 제릉이라 하였다. 이어 1398년(태조 7)에는 절비를 신의왕후로 높이고, 신주를 모신 건물을 인소전(仁昭殿)이라 하였다(『태조실록』 7년 11월 11일). 신의왕후의 아들인 태종은 1404년(태종 4)에 신도비를 세웠으며(『태종실록』 4년 2월 18일), 1407년(태종 7)에는 박자청(朴子靑)에게 석실과 난간석, 상석 등을 조성하게 하였다. 또 이듬해에는 시호를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로 높였는데, 1683년(숙종 9)에 숙종은 ‘태(太)’ 자가 있는 것이 불편하다며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바꾸었다.

조성 상황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왕릉은 승려들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장인들에 의해 조성되었다. 이들을 지휘 감독한 것은 환관 김사행(金師幸)으로, 1398년(태조 7)에 참수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왕릉 조성에 참여하였다. 공민왕의 능인 현릉(玄陵)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능인 정릉(正陵)을 비롯해,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인 정릉(貞陵)과 신의왕후의 제릉을 조성하는 데도 관여하였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왕릉 동쪽으로는 노적산(露積山)을, 서쪽으로는 광덕산(廣德山)을, 남쪽으로는 취봉산(鷲峯山)을, 북쪽으로는 용수산(龍水山)을 주위로 하여 십리(十里)를 경계로 조성되었다. 재실 동쪽에는 길이가 22보, 폭이 27보 연지가 있었으며, 공민왕의 능과 비슷한 난간석과 병풍석 등이 조성되어 있다.

변천

신의왕후한씨는 이성계가 등극하기 약 10개월 전에 승하하였으므로, 제릉은 한씨의 당시 신분에 따라 묘로 축조되었다. 이후 능으로 격상되었으나, 태조는 처음 조성된 묘의 봉분 규모를 확장하지 않고 주변 석물과 호석(護石)의 구조만 개수하였다. 한편 봉분의 석실 내부 규모 및 구조는 고려시대의 능묘 제도에 준하여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능원지(陵園誌)』
  • 『춘관통고(春官通考)
  • 목을수, 『고려·조선능지』, 문성당, 1991.
  •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 임영애, 「개성 공민왕릉 석인상 연구」, 『강좌미술사』17,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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