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조(行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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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혹은 변란시 국왕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르는 곳으로 임진왜란과 호란시 행조를 두었음.

개설

임진왜란 중 평안도로 피난한 선조가 조정을 세자의 조정인 분조와 자신의 조정으로 나눈 이후 선조의 조정을 행조라 칭하게 된다. 행조와 분조는 행정적,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복을 피하면서 관할하는 영역을 구분하고 각각 전쟁을 수행하였다. 1592년 말부터 분조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이듬해 초 조·명 연합군의 평양 탈환 이후 분조와 행조는 통합되었다. 한편 병자호란시 인조가 남한산성에 이거했을 때에도 행궁의 조정을 행조라고 하였다. 다만 행궁의 조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행조와는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예컨대 현종대 온양 행궁을 행조라고 하는 것은 비상시국의 행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궁의 조정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시 행조를 본다면, 1592년(선조 25) 6월 일본군이 조선군의 대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평양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당시 평안도 영변(寧邊)의 행재소에 머물고 있던 선조는 일본군이 추격해 올 것에 대비하여 조정을 국왕과 세자의 조정으로 나눌 것을 결심하였다. 이는 일본군의 최종 목표가 조선의 전 국토 점령이어서 국내에서 국왕의 피난처를 구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선조는 명나라로 넘어가고 세자는 조선에 남아 전쟁을 지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세자의 조정인 분조가 6월 14일 영변에서 성립되고 국정을 감독하고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한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감국무군분조(監國撫軍分朝)’가 성립되게 된 것이다. 분조의 역할과 지위에 비해 그 행정 조직은 상당히 빈약하였는데 이는 세자를 호종하는 신하의 수가 최초 10여 인에 지나지 않았고 전쟁의 국면에 따라 분조의 이동도 매우 빈번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 분조의 규모가 커지면서 강원도 이천(伊川)으로 이동하였을 때에는 호종하는 조사(朝士)가 100여 인에 이를 정도였다. 아울러 순변사이일(李鎰)이 분조에 들어온 뒤 분조에는 직속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면서 정치적 위상도 커지고 적극적인 군사적 활동이 가능해졌다. 이에 세자의 분조는 동조(東朝)라 불렸고, 선조의 조정은 대조(大朝), 행재소(行在所), 행조(行朝) 등으로 불리며 분명히 구분되어 인식되었다.

조직 및 역할

임진왜란 초기 선조가 계획한 요동으로의 피난은 행조 신하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함께 선조의 월경(越境)에 대한 명나라의 강력한 견제로 인해 어려워졌다. 특히 일본군이 대동강을 돌파한 다음날인 6월 15일 명나라의 요동 군사들이 조선으로 출병함에 따라 선조가 명으로 피난하기는 어려워졌다. 이에 의주의 행조는 세자의 분조와 병존하면서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기존 조선의 조정 체제는 약간 축소된 상태에서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다만 행정적,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복을 피하며 관할 영역이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 분조는 평안도 성천 일대와 경기, 황해, 강원, 함경도 지역을 행정적으로 관할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대체로 행조에서 담당하였다. 군사적으로는 황해, 경기, 강원도 방면은 분조의 독자적인 작전 지역이었지만 평양의 일본군과 직접 대치하고 있던 지역, 예를 들어 용강, 삼화, 병산, 강서, 중화를 잇는 선에서 순안에 주둔하고 있던 평안도순변사이원익이 도원수김명원, 순변사이빈 등의 군사와 함께 행조의 지휘와 명령을 받으며 평양의 일본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변천

분조가 안정화되면서 7월 23일 이후 끊겼던 의주의 행조와의 연락도 8월 10일 재개되었다. 두 조정의 연락이 빈번해지면서 부작용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이원적인 정치 구조의 비효율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에 행조에서는 분조를 예속시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10월부터 분조의 시강원에 대한 인사를 계속 단행하여 세자를 호종하였던 분조의 신하를 의주행조 계열의 인물로 대치하였다. 이어서 11월 말 용강 분조 때에는 분조의 주요 신하였던 유홍(兪泓)을 행조에서 차출하여 황해, 경기, 강원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로 임명하여 황해도로 전출시켰다. 이로써 분조는 인적 구성상의 독립성마저 약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분조의 행정 및 군사적 관할이던 세 도의 군령권은 행조 직속의 삼도도체찰사에게 이양되었다. 아울러 명군과 협력하면서 평양을 공격하려는 목적으로 안주에서 명칭 없이 군무를 감독하던 유성룡(柳成龍)을 12월 도체찰사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평안도 방면 분조의 군령권도 행조 직속의 도체찰사로 넘어가면서 분조의 평안도 지역에 대한 독자적인 군사작전 권한은 상실되었다. 이에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초 조·명 연합군의 평양 수복 후 명군에 대한 국왕의 적극적인 지원이 요구된다는 논의의 과정에서 분조의 신하들이 행조에 합류하면서 분조는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 『약포집(藥圃集)』
  • 『오음선생유고(梧陰先生遺稿)』
  • 『우계집(牛溪集)』
  • 남도영, 「임진왜란시 광해군의 활동연구」, 『국사관논총』9, 1990.
  • 최종성, 「임진왜란시 분조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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