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감(下都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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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하도감 |
한글표제 | 하도감 |
한자표제 | 下都監 |
관련어 | 훈련도감(訓鍊都監), 분영(分營), 별기군(別技軍) |
분야 | 정치/군사·국방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노영구 |
폐지 시기 | 19세기 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하도감(下都監) |
조선후기 도성의 군영인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속한 분영(分營)의 하나.
개설
17세기 중반 효종대 도성의 방어 체계 강화를 위해 지대가 낮은 도성의 동쪽 지역에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을 설치하여 다수의 군병을 배치하였다. 하도감은 훈련도감의 여러 분영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으며, 군사의 주둔 이외에 화약과 각종 무기의 제조 등을 담당하는 관서와 함께 각종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 등이 있었다. 아울러 훈련장도 갖추고 있어 군사 훈련도 실시할 수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 창설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중 규모가 커진 훈련도감은 본청 이외에 한성과 궁궐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1594년(선조 27) 전·후·좌·우·중영(中營)의 다섯 개 영을 도성 내외에 설치하였다. 이 5영은 이후 원동에 위치한 북영(北營), 돈화문 밖의 남영(南營), 경희궁 내 숭의궁 밖의 서영(西營), 경희궁 흥화문 밖의 신영(新營), 응봉 밑의 광지영(廣知營), 경희궁 무덕문 밖의 북일영(北一營) 등의 여러 개의 분영으로 개편 증설되어 도성 내외의 방비와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였다. 한성은 지리적으로 동쪽의 지대가 낮아 방어에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이곳의 방어 강화 필요성이 높았다. 이에 17세기 중반 효종대에 훈련원(訓鍊院) 동쪽 옆인 남부(南部) 명철방(明哲坊), 오늘날의 을지로 6가 지역의 옛 동대문운동강 야구장 자리에 하도감을 설치하고 훈련도감 본청의 군사를 나누어 주둔시켜 한성의 동쪽 방비를 강화시켰다.
조직 및 역할
하도감은 훈련도감의 여러 분영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컸는데, 평소 이곳에서 입직하는 군사들은 종사관 1인과 감관(監官)과 기패관(旗牌官) 1인이 보군(步軍) 30명과 조총색(鳥銃色) 14명, 화약색(火藥色) 6명, 월과색별파진(月課色別破陣) 10명을 지휘하게 하였다. 이곳에는 군사의 주둔 이외에도 각종 공장(工匠)들이 입역하여 훈련도감에 필요한 각종 무기 등을 제조하였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하도감은 그 규모가 390칸에 이르렀고 조총색(鳥銃色), 화약색(火藥色) 등의 부속 관청을 두었다. 조총색과 화약색에는 책임자로 각각 낭청(郎廳) 1인이 있었다. 그 아래 수 개의 소(所)를 두어 감관 1인씩 배치되어 조총과 화약을 제조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총, 환도 등의 무기와 비상용 소금 1,000여 석 등을 저장한 것을 보면 대규모 군창(軍倉)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도성 방위의 주요 군영이었던 훈련도감은 19세기 들어서면서 그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면서 하도감에서의 화약 및 무기 제조의 필요성이 적어졌다. 이에 홍경래의 난이 끝난 직후인 1811년(순조 11)에 조총색, 화약색의 낭청과 감관을 폐지하고 임명하지 않았다. 1881년(고종 18) 5월 신식 군대인 이른바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면서 이들은 주로 하도감을 훈련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종수, 『조선후기 중앙군제연구-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변동-』, 혜안,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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