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진(永宗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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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남양도호부 영종도에 설치한 수군진.

개설

영종도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강도(江都: 현 강화도)로 연결되는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17세기에 수군진이 설치되어 첨사가 파견되었다가, 방어영으로 승격되었다. 조선후기에 영종진은 삼남지방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바닷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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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에 수도를 방어하는 일은 영종도와 교동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영종도는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연결되는 해로를 방비하였고, 교동도는 황해도·평안도에서 수도(首都)로 오가는 바닷길을 방어하였다.

17세기 중앙관료들이 영종도에 수군진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이 군량미가 부족하다며 영종진 설치를 반대하였으나 우의정 민암(閔黯)은 강화도를 방비하는 일은 시급하기 때문에 인근 지역 군량미를 모아 수군진을 개설하자고 주장하였다(『숙종실록』 18년 5월 16일).

그 결과 숙종대 영종도에 수군첨사가 파견되었다. 그 후 영조대 영종도와 교동도에 각각 좌·우방어사(左·右防禦使)를 파견하여 강화도 수비를 강화하였다(『영조실록』 39년 11월 29일).

조직 및 역할

17세기 영종진은 강화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또 나라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영종도에 목장·솔밭·둔전 등을 개설하였다(『숙종실록』 31년 5월 26일). 18세기 영종진에 파견된 방어사는 삼남에서 강화도로 상납하는 물건을 실은 조운선을 보호하였다.

19세기 영종진에 별무사 200명을 파견하여 서해에 출몰하는 이양선을 방어하였다(『고종실록』 8년 1월 25일).

변천

1684년(숙종 10) 영종진은 첨사진으로서 어영청에 편제되었다(『숙종실록』 10년 10월 7일). 1691년(숙종 17)에 첨사진에서 방어영으로 승격하였으며, 휘하에 수군 337명이 배정되었다(『숙종실록』 17년 4월 11일).

1785년(정조 9) 영종진에 파견된 방어사는 호구(戶口)·환곡(還穀)·전정(田政)·군정(軍丁) 등을 관리하였다(『정조실록』 9년 7월 14일). 1828년(순종 28)에 영종방어사 이길회(李吉會)의 건의로 영종진에서 무사 선발 시험을 실시하였다(『순조실록』 28년 2월 29일).

1866년(고종 3)에 이양선이 영종도 인근 해상에 출몰하자, 이듬해인 1867년 영종도에 다시 방어영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영종도가 좌방어사로 기능하고, 교동도가 우방어사로 정비되었다(『고종실록』 4년 4월 15일).

1875년(고종 12)에 영종진은 다시 인천방어영(仁川防禦營) 소속으로 옮기고, 5,000냥을 지원하여 관청 건물을 신축하였다(『고종실록』 12년 11월 12일). 1883년(고종 20)에 독진(獨鎭)으로 승격됨에 따라 지방관아와 수군진의 편제에서 분리되었다(『고종실록』 20년 4월 7일).

참고문헌

  • 「영종진지도(永宗鎭地圖)」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인천(구)영종진지: 지표조사보고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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