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청(守禦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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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수도 외곽의 방어와 남한산성의 관리를 담당하였던 중앙 군영(軍營).

개설

1626년(인조 4)에 남한산성이 개축되면서 설치되었다. 원래 개축은 총융사(摠戎使)의 주관 아래 이루어졌다. 1628년에 광주목사로 남한산성방어사(南漢山城防禦使)를 겸하게 했다. 1632년경에 별도의 수어사(守禦使)-별장(別將) 체제가 이루어져 광주부가 분리되었으나 여전히 총융사의 통솔을 받다가 1634년에 이르러 독자성이 인정되었다. 이에 광주 등의 진관(鎭管)의 군무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병자호란을 거친 뒤에 비로소 군영체제가 갖추어졌다. 1683년(숙종 9)에 수어사의 칭호를 폐지하고 유수라고 하여 남한산성에 나아가 진수(鎭守)하다가 1690년에 경영(京營)을 설치하여 수어사의 칭호를 부활하고 부윤(府尹)이 부사(副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1695년 부사의 칭호를 고쳐서 이전대로 부윤이라고 칭하였다. 1750년(영조 26)에 또 경영을 폐지하고 남한산성으로 나아가 진수하여 유수라 칭하고 부윤을 폐지하여 경력(經歷)을 두었다. 1759년에 다시 경영을 두어 수어사를 부활하고 부윤도 회복하였다. 1795년(정조 19) 경영을 폐지하고 남한산성으로 나아가 진수하고 유수라고 칭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집권에 성공했던 인조 정권은 조속한 국내 정치의 안정과 후금(後金)에 대한 강경책을 펼치기 위해 군사력 강화와 방어 시설에 대한 개축을 서둘렀다. 그중의 하나였던 남한산성에 대한 개축이 완료된 1626년에 수어청을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축성을 주도했던 총융사의 직권 아래 놓여 있었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 다시 정비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628년에 광주목사로 남한산성방어사를 겸하게 하는 동시에 읍치(邑治)를 산성으로 옮기면서 한층 더 충실해졌다. 드디어 1632년경에 별도의 수어사가 임명되기 시작했으며, 아울러 별장도 제수되면서 수어사-별장 체제가 갖추어졌다. 이것을 계기로 광주부에서 분리되었으나 여전히 총융사의 통솔을 받다가 1634년에 이르러 그 독자성이 인정되었다. 이에 광주 등의 진관의 군무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명실상부한 군영체제가 갖추어진 것은 병자호란을 겪은 뒤였다.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수어사에 훈척중신(勳戚重臣)을 임명하고 서울에 경청을 두고서 산성을 관할하는 이원체제(二元體制)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서 서울의 경청이 광주부로 나아가 통솔하는 일원체제가 채택되었다가, 또다시 이원체제로 환원하는 등의 조치가 몇 차례 반복되었다.

이는 도성의 방위에 주력해야 할 것인가 남한산성의 관리에 역점을 둘 것인가의 견해 차이에서 발생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여러 차례 조직의 변화를 겪고 나서 1656년(효종 7)에 어느 정도 정비되었다. 산성에 들어가 지키기 위한 속영체제(屬營體制)가 윤곽을 드러냈다. 이때 경기도의 광주읍군·죽산진·양주진의 3진과 강원도의 원주진·회양진, 충청도의 청주진 등이 편성되어 유사시에 들어오게 했다. 1663년(현종 4)에 4영 3부체제로 변경되었다. 속영으로서의 외영(外營)이 4영이고 경청을 중심으로 3부가 편성되었다. 1704년(숙종 30)에 다시 바뀌어 3영 2부로 되었다. 그 뒤 남한산성으로 나갔다가 경청으로 돌아오는 등의 변화가 반복되었으나 3영 2부의 속영체제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상층의 지휘부에는 종2품 사(使) 1명, 종2품 중군(中軍) 1명, 정3품 별장 2명, 정3품 천총(千摠) 1명, 종4품 파총(把摠) 3명, 종6품 종사관(從事官), 종9품 초관(哨官) 12명, 교련관(敎鍊官) 7명, 군관(軍官) 3명이 있었다. 다시 경성에는 한량군관(閑良軍官) 283명이 있었다. 남한산성에는 수성장(守城將) 1명으로 광주부윤이 겸임했다. 정3품 유영별장(留營別將) 1명, 정3품 성기별장(城機別將), 종9품 초관 5명, 교련관 10명, 기패관(旗牌官) 60명, 군관 43명, 권무군관(勸武軍官) 50명, 이속군관(移屬軍官) 250명, 부료군관(付料軍官) 27명이 있었다.

속영체제의 지휘부를 보면 사와 중군 아래 정3품 진영장(鎭營將) 3명으로, 전영장은 본부판관, 중영장은 양주목사, 후영장은 죽산부사가 겸임하였다. 별장은 2명으로 여주목사와 이천부사가 겸임하였다. 그 외 파총 2명, 초관 26명, 교련관 17명, 기패관 19명, 별군관 19명, 수첩군관총(守堞軍官摠) 61명이 있었다.

병력으로는 친아병(親牙兵), 훈어군(訓禦軍), 파하군(把下軍), 난후마병(欄後馬兵), 복로군(伏路軍), 별파군(別破軍), 국별파군(局別破軍), 표하군(標下軍) 등이 있었으며, 정원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변천

서울에 경청을 두고서 산성을 관할하는 이원체제와 경청이 광주부로 나아가 통솔하는 일원체제가 몇 차례 반복되어 설치되었다. 1683년에 수어사의 칭호를 폐지하고 유수라고 하여 남한산성으로 나갔다가 1690년에는 경영을 설치하여 수어사의 칭호를 부활하였다. 1750년에 또 경영을 폐지하고 남한산성으로 나갔다. 1759년에 다시 경영을 두어 수어사를 부활하고 부윤도 회복하였다. 1795년 경영을 폐지하고 남한산성으로 다시 나갔다.

하지만 이즈음에 정조의 왕권 강화와 관련해서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경영을 완전히 매각하였다. 이것은 남한산성으로의 출진을 영구화하려는 조치로서 도성을 방위하기보다는 외곽의 요충지를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1894년 갑오개혁과 관련된 군제개편으로 폐지되었다.

의의

조선후기에 도성의 방위와 그 외곽의 핵심적인 방어 시설이었던 남한산성의 관리를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주 방어 대상이 어느 곳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여러 차례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수도 및 그 권역의 방위체제의 구조와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韓國軍制史 - 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977.
  • 李泰鎭, 『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 變遷』, 韓國硏究院, 1985.
  • 車文燮, 『朝鮮時代軍事關係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1996.
  • 李炫熙, 「南漢山城의 築城」, 『東國史學』33,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