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역(新津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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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의 도로망인 경안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고려시대에는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신진역(新津驛)은 평구도(平丘道)에 속한 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44역도-537속역 체제가 마련되고, 뒤이어 세조 때 다시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되면서 경기도 도로망의 하나인 경안도(慶安道)를 구성하는 역이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했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도 광주목 여흥도호부 편에는 고려시대인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안평역(安平驛)과 함께 신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는 평구도의 속역 30개에 신진역이 포함되어 있고, 신진의 옛 이름이 황리(黃利)라고 되어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신진역의 옛 이름이 신은(新恩)이라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신진역은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전국의 역로망이 44역도-537속역 체제로 정비되면서 경안도 소속이 되었다. 경기도 여주 지역에 설치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여주 편에 따르면, 상등마 1필, 중등마 4필 등 총 5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22명, 역노(驛奴) 12명, 역비(驛婢) 2명이 배정되어 있었다. 신진역은 안동 및 영덕 지역의 진상물과 일본인들이 바치는 공물 등을 한양으로 수송하는 경로에 있는 주요 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원거인(元居人)이 8호(戶)에 지나지 않았고, 또 신진역을 비롯한 경안도의 속역들이 대개 소로(小路)였던 관계로 각종 폐단이 적지 않았다.

변천

1457년(세조 3)에 각지에 있는 역의 관할을 조정하고 정역찰방(程驛察訪)을 두었는데, 이때 신진역은 경기좌도 수참(水站)전운판관(轉運判官) 겸 정역찰방이 맡아 다스리는 경기좌도 수참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9월 12일). 그 뒤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찰방과 역승을 두어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덕풍역(德豊驛)·안기역(安奇驛) 등과 함께 경안도에 속하게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신진역은 이후 조선후기까지 경안도의 속역으로 존속했으나,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진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여주목 동쪽 15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대동지지』에는 여주목 동쪽 5리 지점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여주군 주내면 신진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 근동면에 속했던 신진리는 1914년에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여주읍으로 편입되었다. 오늘날 신진리는 북쪽으로는 연양리, 남쪽으로는 부라우, 서쪽으로는 새재와 접해 있는데, 세 갈래 길 한편에는 이곳에 역말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진역지(新津驛趾)’ 표석이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주군사편찬위원회, 『여주군사』, 여주군사편찬위원회, 2005.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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