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목도감(式目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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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부터 조선 건국 초까지 재상들의 회의·의결 기관.

개설

식목도감은 고려초에 설치되어 법규를 제정하고 관리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일시적으로 도평의사사를 대신하여 최고의 국정기관이 되었다. 조선 개국 뒤에도 계승되었다가 1412년(태종 12)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식목도감의 창설 시기는 분명치 않다. 고려 성종 이후에서 현종대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 삼성(三省)을 두고 별도로 식목도감을 운영한 이유와 기능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식목도감의 명칭에 있어서 식목은 입법을 의미하고 도감은 특정한 일을 한시적으로 담당한 관아이고, 인종 때 식목도감이 왕명을 받아 학교와 과거제 개혁 정책에 부응해서 학칙과 학규를 제정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식목도감은 법규 관련 사무를 처리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설치되어, 법규를 제정하고 이를 관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직 및 역할

식목도감이 성립되었을 때의 조직과 역할은 불명하다. 『고려사』 백관지에는 문종대 관제 정비 때 재상을 임명하는 사(使) 1명, 정3품 이상의 부사(副使) 4명, 5품 이상의 판관(判官) 6명, 녹사(錄事) 8명을 두었는데, 녹사는 갑과(甲科) 권무(權務)로 임명했다. 그러나 관례적으로 수상이 식목도감의 사가 되고 추밀원의 추사가 부사가 되었다. 소관사 논의 때에는 사, 부사가 참여해 합의하여 결정하였는데, 때로는 판관도 회의에 참여했다. 식목도감 녹사는 다른 녹사에 비해 권위가 높고, 출세에도 매우 유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문종 때에 정착된 식목도감은 고려 중기부터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재추회의(宰樞會議)로 기능하게 되면서 권위가 많이 하락하고 녹사를 시켜 문서를 관장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최고 국정논의·의결기관이던 도평의사사를 식목도감에 합병함에 따라 식목도감이 도평의사사를 대신하여 최고의 국정기관이 되었다. 또 이 확대된 기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고위 관직자 이하 고위 관직자가 대거 구성원이 되었다. 첨의정승(僉議政丞)·판삼사사(判三司事)·밀직사(密直使)·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삼사좌사(三司左使)·삼사우사(三司右使)·첨의평리(僉議評理)가 판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하가 사가 되었고, 이후 충숙왕대까지 이 체제가 유지되면서 판사와 사가 상시로 모여 모든 국정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충혜왕 이후 도평의사사가 복치되고 다시 최고의 국정기관으로 기능함에 따라 식목도감은 다시 권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기구는 폐지되지 않고 조선 초까지 지속되었다. 조선 초기 식목도감의 직제는 분명하지 않으나, 1404년 좌정승조준이 식목도감을 시켜 대성(臺省)과 형조(刑曹)를 탄핵했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4년 10월 21일). 이것은 식목도감이 대간 기능을 수행했다기보다는 의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할 기구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1412년에 식목녹사가 의정부 안독녹사(案牘錄事)로 개칭된 것(『태종실록』 12년 11월 5일)과 이후 식목도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에서 이때 식목도감은 그 기능이 의정부로 이관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역옹패설(櫟翁稗說)』
  • 최정환, 『역주 『고려사』 백관지』, 경인문화사, 2006.
  • 변태섭, 「고려의 식목도감」, 『역사교육』15,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