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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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동궁의 시위를 맡아보던 서반(西班)의 관청.

개설

전통시대 세자의 시위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찾을 수 있다. 1054년(고려 문종 8)에 3품 이상의 손자와 5품 이상의 아들 28명을 뽑아 시위로 삼고, 5품의 손자와 7품 이상의 아들 10명을 뽑아 급사(給使)로 삼아 영구히 정한 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그것인데, 이들 시위와 급사가 동궁의 시위를 맡아보았던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28일에 공포된 문무백관의 관제에 의하면 세자의 강학과 시위를 맡아본 관서는 세자관속(世子官屬)이었다. 세자관속에는 정8품의 좌시직(左侍直) 1명과 우시직(右侍直) 1명이 배속되어 이들 2명이 세자의 시위를 담당하였다. 1418년(태종 18) 6월 7일에 별도로 세자익위사를 설치하면서 기왕의 세자좌사위(世子左司衛)를 좌익위(左翊衛)로, 세자우사위를 우익위로 하였으며 기왕의 좌익위와 우익위는 좌익찬(左翼贊)과 우익찬으로 하여 4명을 정원으로 하는 독립된 세자익위사를 설치하였던 사실로 보아, 태조 이후 어느 순간에 좌·우시직이 좌·우사위와 좌·우익위로 증설되었다가 1418년에 세자익위사로 독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세자익위사는 한때 혁파되었다가 예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설치되었는데 『경국대전』에 정5품 아문으로 규정되었다.

조선시대의 세자익위사는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에서 큰 변화를 맞이했다. 동학농민봉기 이후 일제의 간섭하에서 시행된 갑오개혁의 핵심은 중앙관제를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부와 일반 국정 업무를 관장하는 의정부의 2원체제로 바꿈으로써 왕실의 국정 간여를 최소화하려는 것이었다. 갑오개혁 당시 세자익위사는 세자시강원의 일부로 통합되어 궁내부에 소속되었는데, 궁내부에는 승선원, 사옹원, 상의원, 내의원, 태복사, 명부사, 통례원, 내시사, 경연청, 규장각, 종정부, 시강원, 내수사, 전각사, 회계사, 종백부, 장악원 등이 소속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되면서 익위사는 시강원과 함께 이왕직의 서무계에 통폐합됨으로써 완전히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 직후 설치된 세자관속에서 세자의 강학과 시위를 함께 맡아보던 형식이 바뀌게 된 것은 1418년(태종 18)에 이르러서였다. 태종은 세자의 시위를 강화하기 위해 시위 전담기구를 만들 것을 명하고, 시위는 갑사(甲士) 중에 적당한 자 또는 공신의 자제나 재상의 자제 중에서 골라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 1418년(태종 18) 6월 7일에 익위사가 설치되었고 익위사에는 좌·우익위와 좌·우익찬의 4명이 배치되어 세자의 경호를 전담하게 되었다(『태종실록』 18년 6월 7일). 1418년 당시 이미 좌·우익위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본다면 태조 당시 세자관속에 좌·우시직 2명만 있던 상황이 이후 어느 순간인가 좌·우익위가 추가되어 4명으로 확대되었다가 1418년에 익위사로 독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 연간의 기록에 의하면 세자시종관(世子侍從官)을 다시 익위사로 복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써 태종 이후 익위사가 어느 때인가부터 세자시종관으로 불리다가 다시 익위사로 복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5년 3월 11일). 아울러 세종대에 익위사는 병조에 소속되게 되었으며, 이것이 그대로 『경국대전』에 반영되어 대전에서는 세자익위사가 병조에 소속된 정5품 아문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조선후기에는 세자익위사 이외에 세손의 시위를 위해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라는 서반의 관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세손위종사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가 생존한 상태에서 왕세손이 책봉된 상황에서 설치되었다. 당시 왕세손에 책봉된 주인공이 훗날의 정조로서 그는 여덟 살에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이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열두 살까지 4년간 세자와 세손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에서 세손의 시위를 위해 특별히 위종사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위종사의 직무 및 조직은 익위사를 거의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즉 위종사는 세손을 모시고 경호하는 일을 관장하였으며, 종6품의 좌·우장사(左·右長史) 각 1명과 종7품의 좌·우종사(左·右從史) 각 1명 등 4명이 배속되었다. 위종사의 관원 역시 익위사와 마찬가지로 입직하는 1명이 세손의 학습에 참여하여 질의에 응답하도록 하였으며, 참하관은 근무일수 900일이 차면 6품으로 승진하도록 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경국대전』에 의하면 세자익위사는 병전(兵典)의 정5품 아문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직무는 동궁을 모시고 경호하는 일을 관장한다고 하였다. 소속 관원에는 정5품의 좌·우익위 각 1명, 종5품의 좌·우사어(左·右司禦) 각 1명, 정6품의 좌·우익찬 각 1명, 종6품의 좌·우위솔 각 1명, 정7품의 좌·우부솔 각 1명, 정8품의 좌·우시직 각 1명, 정9품의 좌·우세마 각 1명 등 총 14명이 있었다. 이 외에 이속(吏續)으로 서리 2명, 사령 7명, 군사 4명이 더 있었다.

익위사는 세자가 나가면 앞에서 인도하고, 강관이 회강(會講)하면 섬돌 아래 모시고 서 있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들어 익위사는 시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서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성문준(成文濬)이 세마였을 때, 강관이 자리에 올라와서 강에 참여하기를 요청하여 허락을 받음으로써 시작되었는데 후에 이것이 전례가 되어 『대전통편』에서는 익위사에 입직하는 시위 중의 1명이 서연에 참여하는 것으로 명문화되기까지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에 익위사는 세자의 시위뿐만 아니라 강학까지 담당하는 기구로 되었는데, 이는 익위사의 시위들은 세자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출입을 같이하여 사물을 만나 가르치고 일에 따라 간쟁까지 해야 한다는 명분에서 무예뿐만 아니라 학문 실력까지 뛰어난 사람들로 충원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세자익위사의 관원은 동궁의 경호라는 측면 이외에 교육이라는 측면도 강조되어 익위사 관원은 반드시 세 명을 추천받아 그중에서 적합한 사람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변천

세자익위사는 1894년(고종 31) 7월 18일 자에 군국기무처에서 제의한 개혁안에 의해 시강원에 소속되었다. 당시 군국기무처의 개혁안에 의하면 세자익위사는 강서원(講書院), 위종사(衛從司)와 함께 세자시강원에 배속되었으며, 세자시강원은 궁내부 소속이었다.

당시의 시강원 관제에 의하면 시강원에서는 경서와 역사를 강론하며 도덕과 의리를 깨우치는 일을 맡았으며, 의정부 대신을 지낸 사람 중에서 겸임하는 사 1명, 의정부 대신을 지낸 사람 중에서 겸임하거나 혹은 대학사가 겸임하는 부 1명, 대학사나 찬선을 지낸 사람 중에서 추천을 받아 임명되는 이사 1명, 경연 학사나 규장각 학사 또는 협판(協辦)을 지낸 사람 중에서 겸임하는 빈객 2명, 적당한 사람으로 추천되는 찬선 1명, 보덕 1명, 필선 1명, 적당한 사람으로 추천되는 진선 1명, 문학 1명, 사서 1명, 설서 1명, 적당한 사람으로 추천되는 자의 1명이 배속되었다. 아울러 익위사에는 익위 1명, 사어 1명, 익찬 1명, 위솔 1명, 부솔 1명, 시직 1명, 세마 1명, 전서(典書) 2명이 배속되었는데 이는 기왕의 익위사 관제에 비하면 거의 절반 수준으로 감축된 규모였다.

갑오개혁 이후 궁내부 산하의 시강원에 소속되어 있던 익위사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태자익위사로 불리다가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되면서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황실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910년 12월 30일에 이왕직 관제를 공포하였다. 이왕직이 설치됨에 따라 기존의 궁내부 업무는 자연히 이왕직으로 이관되었다. 이에 따라 이왕직이 업무를 개시하기 하루 전인 1911년 1월 30일에 구궁내부의 모든 직원들은 해직되고 업무도 정지되었다. 이때 해직된 구궁내부의 직원이 326명이었고, 고용직으로 있다가 해직된 사람이 340여 명에 이르렀다. 이왕직은 1911년 2월 1일부터 구궁내부의 각종 업무를 접수하여 업무를 보기 시작했으며 관원들도 임명하였는데, 초대 이왕직 장관에는 민병석이 그리고 차관에는 일본인 소궁삼보송(小宮三保松)이 임명되었다. 동시에 이왕직의 사무분장에 관하여도 자세한 규정이 제정되어 서무계, 회계계, 장시계(掌侍係), 장사계(掌祀係), 장원계(掌苑係) 등 5개의 계가 설치되었다. 서무계는 궁내부의 경연청, 규장각, 종정부, 시강원 등의 업무를 인수하였으며 회계계는 내수사, 전각사, 회계사의 업무를, 장시계는 승선원, 사옹원, 상의원, 내의원, 태복사, 명부사, 통례원, 내시사의 업무를, 장사계는 종백부와 장악원의 업무를, 그리고 장원계는 궁궐의 후원 관련 업무를 인수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세자익위사는 일제하 이왕직의 서무계로 흡수, 통합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하겠다.

의의

조선시대의 세자익위사는 형식상 세자의 시위를 전담하던 서반의 관청이었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세자익위사의 입직관원도 서연에 참여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무보다는 문을 중시하였던 문치주의의 산물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문식·김정호, 『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영사, 2003.
  • 신명호, 『조선왕실의 자녀교육법』, 시공사, 2005.
  • 이기순, 「인조조의 반정공신세력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history.go.kr) 시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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