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진(蒜山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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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황해도의 산산에 설치한 진영.

개설

산산진은 황해도 황주(黃州)에 있던 극성(棘城)이 본래의 출발지였다. 교통의 요지였던 까닭에 이미 고려 때부터 성이 있었으며,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황주의 주민들이 산산(蒜山)에 머물렀는데 일본군의 공격에도 함락당하지 않았다. 1678년에 극성진의 옛터에는 산산진을, 황주 북쪽에는 흑교진(黑橋鎭)을 설치했다. 1682년 두 진(鎭)을 합하여 극성진으로 옮겨 첨절제사영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처음부터 병력이 부족하고 성도 부실했던 탓에 『대전통편』에 이르러 병마동첨절제사로 격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의 증언에 따르면 황주 백성들이 산산에 모여 있었는데, 일본군이 여러 차례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주목을 받으면서 축성과 함께 진의 설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산산은 황주와 봉산(鳳山)의 중간에 있어서 당시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숙종 때 들어서 본격적으로 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먼저 1678년 극성진의 옛터에 산산진을 설치하였다. 같은 시기에 황주의 북쪽 20리 지점에 흑교진을 두었다. 그러나 한 지역에 두 개의 진이 있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1682년(숙종 8)에 산산·흑교 두 진을 하나로 합치면서, 극성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더불어 첨사영으로 승격시켰으며, 황주·봉산에서 각각 전지 200결(結)을 내주어 해서(海西)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8년 1월 3일).

하지만 군사가 적어서 지키기 어려워 당시 황해도병마절도사의 건의에 따라 가까운 신천(信川)과 재령(載寧) 두 고을의 군사 1,700여 명과 본진의 아병(牙兵)을 합쳐 한 군영을 만들었다. 아울러 첨절제사가 거느린 안악(安岳)의 군사 2,000여 명을 옮겨 중군(中軍)으로 정하도록 했다(『숙종실록』 10년 7월 21일).

조직 및 역할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종3품의 병마첨절제사를 두도록 규정되었다.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정부는 지방군을 강화하고자 영장제(營將制)를 도입하였다. 군사적 지식이 있는 당상관을 전임 영장으로 파견하여 거진수령이 행사하던 군사 지휘권을 이양받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지 비용이 너무 커서 혁파했다. 대신 병자호란 이후에 수령이 겸하는 겸영장제를 시행하여 산산진첨절제사가 별중영장(別中營將)을 겸하게 하였다.

아울러 성이 오래되어 부실해짐에 따라 새로 지을 방법을 모색하거나(『영조실록』 5년 4월 25일), 요새를 튼튼하게 지키는 대책의 하나로 진에 소나무와 뽕나무를 많이 심도록 권장하는 방안이 거론되기도 했다(『영조실록』 10년 1월 13일).

변천

흙으로 쌓은 옛 성터가 매우 낮아서 겨우 열 자밖에 안 되고 중간에 또한 무너진 곳도 많아서 상당히 불안한 실정이었다. 이에 1734년 당시 병마절도사였던 박찬신(朴纘新)이 진의 첨절제사를 폐지하고, 본영(本營)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 우후(虞候)를 절충과(折衝窠)로 삼아 함께 관장하게 하였다. 우후를 극성의 안에 옮겨 거처하게 하되, 겨울철 3개월간 병마절도사가 주둔하여 방비[留防]하고, 우후는 돌아와 본영을 지키게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영조실록』 10년 6월 29일). 현실적인 여건으로 인해 산산진을 첨절제사진으로 운영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대전통편』에 이르러 산산진을 강등시켜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두도록 했다. 아울러 별중영장도 줄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 1977.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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