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상사(奉常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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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 제사 의식 관련 업무와 악공의 감독 역할을 맡아보던 궁내부 산하 기구.

개설

봉상사는 조선시대 봉상시(奉常寺)를 계승하여 1895년(고종 32) 4월 궁내부 산하 기구로 설치되었다. 고종이 실권을 회복하여 궁내부의 구성이 확대·강화되어 갈 때 봉상사의 직원 규모도 조금씩 늘어났다. 대한제국 시기에도 국가 제사, 시호 관련 업무, 능·원 관리 업무 등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봉상시와 역할에 큰 차이는 없었다. 1905년 3월의 궁내부 관제 개정 때에도 유사한 기능을 맡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봉상사는 1895년 4월 2일 궁내부 관제가 반포되면서 궁내부 소속 기구의 하나로 설치되었다. 봉상사는 장예원(掌禮院)·시종원(侍從院)·규장원(奎章院)·회계원(會計院)·내장원(內藏院)·제용원(濟用院) 등 6원 체제 아래에서 장예원 산하에 편성되었다.

조직 및 역할

1895년 4월의 궁내부 관제에서 봉상사의 역할은 제례를 맡고 악공을 감독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주임관인 장(長)은 1인, 판임관인 주사는 4인, 협률랑(協律郞)은 2인이 배정되었다. 조선시대 봉상시는 국가의 제사와 시호를 의론하여 정하는 일을 관장했으며, 협률랑 2인을 두고 있었다. 이것과 비교해 보면 봉상시의 역할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봉상사는 세상을 떠난 왕후의 시호(諡號), 능호(陵號), 전호(殿號)를 의논하는 날을 정한다거나, 없어진 전생서(典牲署)의 기능을 대신하여 제물로 쓸 짐승을 맡아본다거나, 능과 원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 등을 맡아 처리하였다.

변천

봉상사의 직원은 조금씩 늘어났고, 기구의 규모도 점차 확대되어 갔다. 1895년 11월 2차 궁내부 관제 개편 때는 장예원에서 분리되어 궁내부 직속 기구로 독립하였다. 1896년 12월 포달(布達) 제19호에 따라 칙임관인 제조 5명과 주임관인 부제조 10명을 더 두도록 개정되었다. 1900년에는 능이 많은 개성부와 함경남도에 분봉상사(分奉常司)를 설치하고 주사 2인씩을 두어 능을 살피게 하였다. 능에 화재가 나고 능이 훼손되는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1905년 3월 4일 궁내부 관제 개정 때에도 봉상사의 역할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제사 의식과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일을 맡아본다고 규정되었다.

참고문헌

  • 『한말근대법령자료집(韓末近代法令資料集)』
  • 왕현종,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 역사비평사, 2003.
  • 서영희, 「1894~1904년의 정치체제 변동과 궁내부」, 『한국사론』23, 1990.
  • 오연숙, 「대한제국기 고위관료층 연구: 의정부와 궁내부의 칙임관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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